“시간·돈이 우선인 드라마 현장”…여전히 우려되는 ‘동물학대’ [미디어와 동물권③]
드라마 촬영 현장 개선 및 시청자 역할 필요
앞으로 힘차게 달리던 말이 몸 전체가 기우뚱하며 바닥에 고꾸라지는 영상이 지난해 SNS 통해 퍼졌었다. 넘어진 말을 향한 안타까움을 넘어, 모두를 충격에 빠뜨린 점은 이 말의 발에 로프를 묶어 일부러 말을 땅에 처박히게 했다는 것이다.
2022년 KBS2 사극 ‘태종 이방원’의 촬영 현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CG 기술이 발달해 배우 최민식이 한 드라마에서 30대 역할까지 소화하는 것이 가능해진 현재지만, 위험천만한 장면을 촬영하면서도 말에게는 기술도, 비용도 할애하지 않았던 KBS였다. 이 사실이 알려진 이후 ‘태종 이방원’은 약 한 달 여 간 방송을 중단한 뒤 재개했었다.
이 사건은 동물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기도 했다. 이 영상을 공개하고, ‘태종 이방원’ 측을 동물학대 혐의로 고소한 동물권단체 카라의 권나미 활동가는 이렇듯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변화가 더딘 이유에 대해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동물권에 대한 인식 양극화도 물론 원인이지만, 그럼에도 이렇듯 미개한 방식이 부끄럼 없이 사용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를 강제하는 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농림축산식품부에서도 동물 촬영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다만 이 역시도 추진이 너무 더디며, 강제성이 없다면 현장에서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권 활동가는 해당 가이드라인에 대해 “2022년 상반기까지 제작 완료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진척이 없는 상황”이라며 “카라도 정부 협의체에 참여하고 의견을 개진하고 있습니다만, 미디어 종사자들은 강제성이 없는 가이드라인도 부담이 된다는 입장을 주로 나타냈다. 하지만, 강제성 없는 가이드라인으로는 국내 촬영 현장 전반의 동물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다”고 우려했다.
나아가 헐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No Animals Were Harmed”이란 표시는 영화의 제작 과정 중 어떤 동물도 다치거나 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AHA의 인증마크’를 예시로 들며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과정, 전문기관의 검토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동물 학대 촬영 현장을 예방할 수 있으며, 시청자들도 미디어 속 동물과 인간의 안전을 믿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촬영 현장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비교적 동물에 대한 배려 및 전문가의 역할이 잘 수행되는 상업영화 현장과 달리, 빠듯한 일정 속 바쁘게 촬영이 진행되는 드라마 또는 소규모 촬영 현장에서 동물에 대한 학대가 종종 이뤄지곤 하는데, 이러한 환경이 개선되지 않는 한 유사한 사례는 계속될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한 관계자에 따르면 죽는 씬 등을 대신할 수 있는 말 인형 하나를 제작하는 데만 수백만 원이 든다. 물론 말 생명의 가치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드라마 현장에서는 이것이 수시로 무시되곤 했던 것이다.
사극 등 여러 드라마에 참여한 한 드라마 스태프는 “드라마는 전반적으로 안전 절차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시간과 돈에 따라 움직이는 곳이 드라마 현장이다. 스태프들의 노동 환경 문제 또한 이제야 논의가 되고 있는데, 동물의 노동 환경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라며 “이러한 환경을 개선하지 않는 한 지금과 같은 사례는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권 활동가 또한 ‘태종 이방원’ 제작진 3명이 동물보호법 위반(동물학대) 혐의로 검찰에 송치되기는 했으나, 이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의도적으로 말의 다리를 묶어 넘어뜨려 결국 죽음에 이르렀으나 ‘사망 혐의’에서는 벗어났다. 여기에 ‘인맥’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현장의 특성상 폭로가 나오기도 힘들며, 신분을 노출해야 하는 법정 증언은 거의 이뤄지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이 같은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기 위한 시청자들의 역할도 중요해진 시점이다. 권 활동가는 “정부가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미디어 종사자가 가이드라인을 부담스러워하는 지금의 국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청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며 “‘태종 이방원’ 사건이 국내에 처음 알려진 것도 시청자 게시판에 남겨진 시청자의 의견이었다. 동물권행동 카라가 2022년 ‘동물 출연 미디어 모니터링 본부’(동모본)을 제작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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