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스토리]헌재 초심으로 돌아가야

최석진 2023. 4. 14.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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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관 정치 성향 따른 획일적 결론
정치적 사법기관 한계 드러내
헌법이 부여한 사명 되새겨야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헌법재판소를 흔히들 '정치적 사법기관'이라고 얘기한다. 법원을 ‘사법기관’이라고 하는 것과 달리 헌재 앞에 '정치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건 오로지 법에 따라 심판하는 사법부와 달리 국가의 정책과 이념,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 등에 대한 정치적 판단이 헌법재판에 고려되기 때문이다.

가령 아무리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는 평가를 받는 법이라도, 심지어 위헌성이 짙은 법이라도 법원은 언제나 실정법을 잣대로 판결을 내려야 하는 반면, 헌재는 과거에는 사회적으로 용인됐던 규범이라도 시대 상황이 변하고, 국민의 법감정이 바뀌어 위헌적이라고 판단되면 법률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한때는 우리 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호주제나 예외 없는 부성(父性) 주의, 간통죄나 낙태죄 처벌 조항들이 헌재의 위헌 또는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바뀐 게 대표적 예다. 이처럼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고, 행정권과 사법권은 물론 국회 입법권까지 통제하라는 것이 헌법이 부여한 헌재의 권한이자 사명이다.

오늘날 헌재의 위상이 정립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1988년 헌재가 처음 설립됐을 당시 헌재는 대법원과 최고 사법기관 자리를 놓고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심지어 법률에 대한 헌재의 '한정위헌' 결정의 효력을 대법원이 인정하지 않아 헌재에서 위헌 결정을 받고도 당사자가 법원에서 패소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다. 대법원에 비해 역사가 턱없이 짧았던 데다가 대법관이 되지 못한 판사, 검찰총장이 되지 못한 검사가 헌법재판관에 임명됐던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과 두 차례에 걸친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사건 등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모은 굵직한 사건들에 대한 결정들을 차례로 내놓으며 헌재는 존재감을 키울 수 있었다.

지난달 헌재는 민주당이 주도한 개정 검찰청법과 개정 형사소송법 등 이른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률과 관련된 권한쟁의심판 사건에서 '절차적으로 위헌·위법한 부분은 있었지만 통과된 법은 유효하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민주당 소속 민형배 의원이 '꼼수 탈당'을 통해 여야 동수로 구성하도록 한 안건조정위원회를 무력화시킨 행태가 국민의힘 의원들의 심의·표결권을 침해한 위법·위헌적인 행위였음을 인정하면서도, 국회 본회의에서의 법률안 통과 과정에는 문제가 없다고 봤다.

헌재 결정의 옳고 그름을 떠나 충격적이었던 건 각 재판관들의 정치 성향에 따라 극명하게 입장이 갈린 점이었다.

진보 성향으로 분류되는 유남석 헌법재판소장과 문형배·김기영·이석태 재판관은 국민의힘 의원들이 낸 청구는 전부 기각 의견을,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검사들이 낸 청구는 각하 의견을 냈다. 그리고 이번 사건에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한 이미선 재판관은 '꼼수 탈당'의 위법·위헌성을 인정하면서도 나머지 모든 쟁점에서 진보 성향 재판관들과 결론을 같이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지명한 유 소장은 김명수 대법원장이 회장을 지낸 우리법연구회 창립 멤버다. 역시 문 전 대통령이 지명한 이미선 재판관과 민주당이 지명한 김기영 재판관은 김 대법원장이 초대, 2대 회장을 지낸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이다. 문 재판관도 문 전 대통령이 지명했다. 그리고 김 대법원장이 지명한 이석태 재판관은 진보 성향의 변호사단체 민변 회장 출신이다.

다수당의 폭주를 막기 위해 마련된 국회법 조항의 취지나 해당 법률들이 국민들에게 끼칠 영향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각 쟁점마다 치열하게 의견이 갈렸던 1997년 '노동법 날치기' 권한쟁의 사건 때보다 퇴보한 느낌이다.

헌재는 '정치적'일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본체는 '사법기관'이다. 헌법과 국민의 권리 보호를 위한 치열한 법리적 고민 대신, 나를 임명해 준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보수인지 혹은 진보인지, 정치 성향에 따라 획일적 결론을 내놓는 재판관들이 존재하는 한 헌재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헌재가 초심을 잃고 정치적 이념에 따라 흔들리며 조직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결정을 이어간다면, 헌재 무용론, 헌재 폐지론이 제기될 날이 오지 않을 거라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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