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에는 '42번 등번호' 다는 날이 있다
[양형석 기자]
2022년 10월 8일 이미 가을야구 탈락이 확정된 부산 사직야구장에는 2만 2900명의 관중이 가득 모였다. 롯데 자이언츠 역사상 최고의 타자 이대호가 현역생활을 마감하면서 등번호 10번이 고 최동원의 11번에 이어 구단 역대 2번째로 영구결번으로 지정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롯데 선수들은 모두 이대호의 등번호 10번이 새겨진 특별 유니폼을 입고 '조선의 4번타자'와 함께 하는 마지막 경기를 소화했다.
프로 스포츠 선수, 특히 야구선수들은 자신의 등번호에 상당히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특히 메이저리그에서는 등번호에 대한 애정이 더욱 크다. '코리안 특급' 박찬호와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도 이름만큼 61번과 99번의 등번호가 매우 유명하다. '추추트레인' 추신수(SSG랜더스) 역시 2021년 KBO리그로 복귀하면서 자신에게 등번호 17번을 양보한 투수 이태양(한화 이글스)에게 고가의 시계를 선물한 바 있다.
▲ 세계적으로 1억 달러 가까운 흥행성적을 기록한 <42>는 국내에서는 개봉조차 하지 못했다. |
ⓒ 워너 브라더스 |
'재키 로빈슨 데이'에 세상 떠난 영원한 블랙 팬서
1976년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에서 태어난 고 채드윅 보즈먼은 2003년 TV드라마를 통해 데뷔했지만 여느 스타배우들처럼 일찌감치 주목을 받진 못했다. 그렇게 무명생활을 전전하던 보즈먼은 2013년 재키 로빈슨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 42 >에서 주인공 재키 로빈슨 역에 캐스팅됐다. 보즈먼에게는 30대 중반의 적지 않은 나이에 찾아온 일생일대의 기회였고 보즈먼은 다행히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영화 < 42 >는 국내에서는 개봉조차 하지 못했고 대부분의 극장수익이 북미에서 발생했음에도 4000만 달러의 제작비로 97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하며 선전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 42 >를 통해 얼굴을 알린 보즈먼은 2014년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드래프트 데이>에서 풋볼선수 본테 맥을 연기했고 <겟 온 업>에서 제임스 브라운, <갓 오브 이집트>에서 '지혜의 신' 토트 역을 맡으며 착실히 필모그라피를 쌓았다.
그렇게 할리우드에서 입지를 넓히던 보즈먼은 2016년 마블 시네마 유니버스의 흑인 히어로 블랙 팬서 역에 낙점되면서 MCU 세계관에 합류했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첫 등장한 블랙 팬서는 <블랙 팬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어벤져스: 엔드게임>까지 총 4편의 시리즈에 등장했다. 보즈먼이 출연한 4편의 마블 영화는 모두 세계흥행 10억 달러를 돌파하며 도합 73억 800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보즈먼은 2019년 <어벤져스>의 루소형제가 제작한 범죄 액션 영화 < 21브릿지:테러 셧다운 >에 출연했지만 흥행에 실패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보즈먼은 2020년 넷플릭스 영화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라는 또 하나의 대표작을 만났다.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에서 레비 그린을 연기한 보즈먼은 골든글로브와 미배우 조합상,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 남우주연상을 휩쓸며 스타성은 물론이고 연기력까지 갖춘 배우로 인정 받았다.
하지만 보즈먼은 <블랙팬서: 와칸다 포에버> 촬영이 한창이던 2020년 8월 대장암으로 사망하면서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사후, 보즈먼이 대장암 판정을 선고 받은 시기가 2016년이었음이 밝혀졌는데 보즈먼은 암 투병을 하면서 블랙 팬서의 힘든 액션 연기를 해냈다는 뜻이다. 공교롭게도 보즈먼이 사망한 2020년 8월 28일은 메이저리그에서 코로나19로 연기됐던 재키 로빈슨 데이 행사가 열린 날이었다.
▲ 재키 로빈슨 역으로 주연 데뷔를 했던 채드윅 보즈먼은 3년 후 마블 히어로 블랙 팬서가 됐다. |
ⓒ 워너 브라더스 |
사실 영화의 주인공 재키 로빈슨은 베이브 루스나 조 디마지오, 테드 윌리엄스 같은 메이저리그 역사 속 위대한 선수들처럼 엄청난 기록을 만들어낸 선수는 아니다. 1947년 신인왕과 1949년 내셔널리그 MVP 수상자지만 월드시리즈 우승 경험은 한 번(1955년) 뿐이고 빅리그 경력도 10년에 불과하다. 사실 메이저리그 역사를 뒤질 필요도 없이 현역 선수 중에서도 재키 로빈슨보다 좋은 커리어를 만들고 있는 선수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로빈슨은 흑인이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1947년 역사상 처음으로 메이저리그에 입성해 온갖 인종차별과 편견을 극복하고 메이저리그에서 자리 잡은 최초의 선수다. 사첼 페이지와 윌리 메이스, 켄 그리피 주니어, 프랭크 토마스 등 여러 흑인 선수들이 메이저리그를 빛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재키 로빈슨이라는 선구자가 있었기 때문이라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편파판정의 희생양이 되고 이웃에게 노골적인 테러협박을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선수생활을 이어가던 로빈슨(채드윈 보즈먼 분)은 상대 감독의 도에 지나친 욕설과 비난에 멘탈이 크게 흔들린다. 그렇게 쌓였던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 브루클린 다저스의 동료 에디 스탠키가 나서 로빈슨 대신 상대 감독에게 거칠게 항의했고 힘든 순간을 참고 인내한 로빈슨은 조금씩 다저스 동료들에게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저스의 내셔널리그 자력우승이 걸린 신시내티 레즈와의 경기를 앞두고 신시내티가 고향인 유격수 피 위 리즈(루카스 블랙 분)는 로빈슨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인종차별을 견딘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그리고 < 42 >의 최고 명대사이자 이 영화의 주제를 담고 있는 "어쩌면 내일은 우리 모두가 42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을지도 몰라"라는 '예언'을 하고 활짝 웃으며 로빈슨에게 공을 건네준다.
지난 2013년 영화 < 42 > 제작진은 개봉을 앞두고 LA다저스의 애리조나 스프링캠프에서 현역 다저스 선수들과 레전드 선수들을 초대해 특별 시사회를 열기도 했다(재키 로빈슨이 활약했던 브루클린 다저스는 LA다저스의 전신구단이다).
▲ 해리슨 포드는 재기 로빈슨을 스카우트한 실존 인물 브랜치 리키 단장을 연기했다. |
ⓒ 워너 브라더스 |
영화 < 42 >에서는 재키 로빈슨 역의 채드윅 보즈먼을 비롯해 야구선수 역할의 배우들 대부분이 관객들에게 크게 알려지지 않은 무명이었다. 하지만 로빈슨을 스카우트하는 브루클린 다저스의 단장 브랜치 리키(역시 실존인물이다)는 할리우드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유명한 배우가 연기했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한 솔로,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인디아나 존스로 유명한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명배우 해리슨 포드가 그 주인공이다.
사실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리키 단장 역시 처음에는 '인종차별 타파' 같은 대단한 명분이 아닌 팀에 흑인관중들을 늘리기 위해 흑인리그의 스타였던 로빈슨을 영입했다. 하지만 리키 단장은 과거 대학 코치시절 팀 내 최고타자였던 흑인선수의 부상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는 죄책감이 있었고 그것이 로빈슨에게 더욱 애정을 갖는 계기가 됐다. 로빈슨의 존재와 활약이 리키 단장의 오랜 상처를 씻어준 셈이다.
로빈슨에게 '42번 유니폼'이야기를 처음 꺼냈던 피 위 리즈 역시 실존인물로 다저스에서만 16년 동안 활약하며 10번이나 올스타에 선정됐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피 위의 등번호 1번은 다저스의 영구결번 14개 중 하나이고 1984년에는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기도 했다. 피 위는 "사람을 미워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피부색은 그 이유에 포함될 수 없다"고 말하는 등 현역 시절부터 흑인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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