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가 쓴 100쇄 에세이
[김성호 기자]
전 국민이 기억하는 월드컵 명승부가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16강전, 한국과 이탈리아의 경기다. 선제골을 먹고 끌려가던 한국 대표팀은 후반 종료 직전 설기현의 극적인 동점골로 경기를 연장전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몇 분 뒤 모두가 기억하는 안정환의 극적인 골든골이 터져 나온다.
한국의 환호 뒤엔 축구명가 이탈리아의 절망이 자리한다. 축구에 인생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이탈리아의 들끓는 열정은 예상치 않은 패배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에게 한국은 스포츠에선 경쟁상대가 아닌 아시아의 작은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게 어떻게 질 수 있다는 말인가.
비단 선수들뿐 아니었다. 이탈리아 현지의 분노도 상상을 초월했다. 결승골의 주인공 안정환은 당시 소속팀인 페루자에서 황당한 방출통보를 받는다. 그 스스로도 페루자 현지 민심을 두려워해 이탈리아에 들어가지 못했다니 당시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 <라틴어 수업> 책 표지 |
ⓒ 흐름출판 |
시험이 치러진 날은 월드컵 16강전이 치러진 당일이었다. 이탈리아의 패배가 학문으로 단련된 법학 교수의 눈마저 가려버린 것이다. 절실하고 억울한 마음을 담아 겨우 교수를 설득한 끝에 그는 시험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는 라테라노 대학교를 최우등으로 수료하고 나아가 박사학위까지 취득한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인 최초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의 변호사가 되니, 그가 서강대학교 명강으로 명성을 얻은 <라틴어수업>의 저자 한동일이다.
한동일 교수가 한국에 알려진 건 서강대학교에서 라틴어 수업을 시작하면서다. 초급라틴어, 중급라틴어로 이어지는 그의 강의는 라틴어를 넘어 라틴문명과 유럽의 역사를 아울렀고, 청년들의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타지에서 오랜 학업을 이어간 경험으로부터 입시에 지친 학생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한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그런 이야기가 몇몇 언론을 통해 소개되고, 그 인기에 힘입어 나온 책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것이다.
세계엔 수많은 명강들이 있다지만 수많은 대학교가 자리한 한국에선 그런 강의를 찾기가 유독 어렵다. 지난 시대 유명한 몇몇 교수가 하는 수업엔 구름처럼 학생이 모이고들 했다지만 이제는 그런 수업 또한 사라진 지 오래다. 자기만의 교습법으로 시대와 공명하는 학자의 강의를 만나기가 이토록 어렵단 것은 한국 대학교육의 현장이 얼마나 얄팍한지를, 또 그 교육이 우리의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겠다.
이 같은 세태 속에서 한동일 교수의 강의는 이례적 관심을 얻었다. 다른 학교에서 만나보기 어려운 라틴어 수업인데다,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라는 특이점까지 학생들의 관심을 잡아끌기 충분했다. 여기에 더해 언어를 넘어 인문학에 다가서는 교양적 역할까지 톡톡히 해내어 학교 안팎에서 청강문의가 이어질 정도였단 것이다. 이 같은 인기가 책 출간 제의로 이어진 건 당연한 수순이라 하겠다.
100쇄 찍은 베스트셀러의 가르침
<라틴어수업>은 한동일의 여러 저작 가운데 가장 성공한 책이다. 2017년 출간 이후 100쇄를 찍어내며 서점가에선 여전한 판매량을 자랑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등 비슷한 성격의 여러 청춘지침서 및 자기계발서가 채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곤 한다는 걸 고려하면 이색적인 인기라 할 만하다.
책은 유럽에서의 생활과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겪은 일을 아우르는 가벼운 에세이다. 오늘의 젊은이를 독자로 상정하여 적당한 자극과 위안을 던진다. 대단한 통찰이나 돋보이는 문장을 찾아보긴 어려우나 삶에 지친 이들에게 휴식이 되는 독서란 점은 읽은 이들에게서 흔히 마주하는 감상이다.
혹자는 다소 시시한 에피소드의 나열이라 비판할 수도, 성공한 어른의 흔한 가르침이라 고개를 저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삶 가운데 존재 자체를 응원하며 독려하는 어른을 만나보지 못한 이들에겐 충분한 자극이 될 수도 있을 책이다. 때문에 이 책이 갓 대학에 입학한 학생 선물로 인기가 높은 것이 아닐까.
인간을 키우는 건 지식 아닌 삶
책에는 월드컵 에피소드 만큼이나 흥미로운 사례가 적잖이 실려 관심을 유발한다. 구두닦이를 하던 시절 사장님과 찾았던 부산 어느 카페에서 아무도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았던 장면이 후에 번듯한 차림새로 찾은 같은 장소에서 금세 주문을 받으러 오는 장면과 이어진다. 월드컵 직후 이탈리아에서 겪은 위험은 로마의 한 광장에서 어느 동남아시아인이 유창한 한국어로 "한국사람들, 참 나쁜 사람들입니다"라고 말을 걸어오는 장면과 맞닿는다.
저자의 눈으로 본 여러 사건들을 글로 접하며 독자는 한 인간을 키우기 위해 얼마나 다양한 자극이 필요한지를 실감할 수 있다. 그 역시 그를 알기에 모든 첫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휴강을 선물하며 길가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고 오라고 숙제를 내주는 것이다. 인간을 키우는 건 책 안의 지식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엄격한 문법체계로 결국 사어가 되고 만 라틴어다. 그러나 그 뿌리는 현대 유럽 사회 전역에 굳건히 남아 있다. 언어는 물론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 라틴어를 이해하는 건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며, 라틴어를 매개로 제 삶을 이야기하는 이 같은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제법 지적 자극을 기대할 수가 있다. 이것이 이 책이 가진 효용이라 할 것이다.
한동일 교수는 2016년을 마지막으로 서강대학교와의 동행을 종료했다. 그는 이제 여러 저작을 통해 독자와 만나는 전문 작가로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그 가운데 <라틴어수업>보다 큰 성취를 거둔 책은 없으니 한동일이란 이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펼쳐보아도 좋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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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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