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빵과 커피가 만드는 심심하고 훌륭한 미래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다보니 로스터가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섞어 커피를 내립니다. <편집자말>
[이훈보 기자]
▲ 식빵 |
ⓒ 언스플래쉬 |
일하다 끼니를 놓친 김에 식빵을 먹다보니 자연스레 저 문장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어떤 식빵을 먹고 있을까. 버터가 듬뿍 들어가 고소한 향이 요동치는 식빵일까. 호밀이나 견과류가 들어가 쌉쌀하면서 고소한 맛이 곁들여진 식빵일까. 아니면 호방하게 두 장 사이에 햄이나 계란을 끼워 넣거나 겉을 바삭하게 굽는 조리과정을 더한 것일까. 하지만 내가 지금 즐겨 먹고 또 선명하게 기억하는 식빵은 복잡하지 않았다.
흔하게 살 수 있는 동네 빵집의 식빵. 일터에 나가신 부모님을 기다리며 먹는 임팩트라곤 하나 없는 지루한 맛의 조금 짭짤하고 약간의 단맛이 나면서 질깃한 식빵. 식빵을 먹어야 할 때면 나는 늘 허기져 있었고 적어도 빵은 밥이 아닌 일종의 특식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먹는 재미가 있었다.
아이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식빵을 하나 집어 들고 입을 크게 벌려 최대한 깊숙이 밀어 넣는다. 판판하게 펼쳐진 식빵의 면이 혀를 다 덮고 어금니까지 닿게 식빵을 베어 물곤 했다.
오랜만에 식빵으로 끼니를 때우니 그때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잊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식빵을 먹던 나는 꽤 행복했다는 사실이었다. 나름 풍요로운 20-30대를 사는 동안 많은 음식과 유명 식당을 전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빵을 먹을 때처럼 행복을 느껴본 일이 없었던 것을 새삼 알게 된 것이다.
'아. 이건 무척 행복한 감각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의 감각들이 함께 도착해서였을까. 생각을 시작한 김에 조금 더 파고들어 본다. '설마 나에게 이런 음식이 식빵 하나뿐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몇 가지가 더 있었다.
찬밥, 맹물, 식빵 그리고 커피.
커피를 제외하면 전부 어린 시절에 먹던 음식들이다. 문득 유년시절의 경험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가 사무쳤다. 살면서 그 정도의 신선하고 행복한 경험을 갱신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커피를 제외하고 떠올랐던 식빵과 찬밥과 맹물. 모두 대단히 맛있다고 언급되거나 자극적 음식이 아니었는데도 홀로 먹으면서 맛을 충분히 느끼고 그것을 내면에 새기는 순간들이 있었다. 주변이 고요하게 느껴질 정도로 맛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순간. 어쩌면 그것은 어린 시절에 경험한 일종의 고독이 아니었을까. 하얗고 상처가 없는 행복한 고독이 어린 마음에 새겨졌다.
▲ 빈 공책 |
ⓒ 언스플래쉬 |
우습고 급작스럽지만 그런 간격은 비단 커피뿐이 아니리라. 국가의 간격은 보편적 복지가 될 것이고 일상으로 보면 퇴근 후의 충분한 여가 시간이 될 수 있다. 심심하고 휑해서 누가 어떻게 쓰는 지 의미 없어 보이는 모든 간격이 실은 훌륭한 미래를 내포하고 있다.
나에게는 커피였던 그것이 선명하게 간격을 만들어주었기에 나는 로스터가 되었고 우리는 이렇게 커피를 사연 삼아 인연을 만들고 있지 않은가?
심심한 것은 무척 중요하다. 그래서 이렇게 심심한 맛으로 뻔뻔한 글을 마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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