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공연장의 거대한 사기극... 당한 사람들은 손뼉을 쳤다 [윤한샘의 맥주실록]
[윤한샘 기자]
▲ 2010년 하이네켄이 AC밀란 팬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몰래카메라. |
ⓒ 유튜브 갈무리 |
관객이 꽉 찬 클래식 공연장. 무대에는 바이올린과 첼로가 아름다운 선율을 읊조리고 있었고 대형 스크린에는 섬세한 펜이 리듬에 맞춰 운율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객석에 앉은 이들 대부분의 얼굴에 초조함이 역력했다. 특히 남자들의 표정은 착잡함 그 자체였다.
이들은 이탈리아 축구팀 AC밀란의 팬들로 레알 마드리드와 AC밀란의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포기한 채, 반강제적으로 공연을 관람하는 중이었다. 여자친구와 앉아있는 남자들은 멍한 눈으로 무대를 응시했고 과제를 하기 위해 참가한 남학생들은 손톱을 깨물고 있었다. 저널리스트로 보이는 사내들은 들키지 않을 정도로 연신 하품을 해댔다.
시간이 흐르면서 바이올린과 첼로 위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음악에 맞춰 써 내려가던 시 또한 운율을 벗어나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스크린에 보이던 펜이 마치 관객들의 심경을 헤아리듯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상사에게 싫다고 말하기 어렵죠? 여자 친구에게도 말하기 힘들어요. 그렇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이 경기를 포기할 생각을 했어요?'
동시에 유럽 챔피언스리그 공식 테마곡이 울려 퍼졌고 그제야 사람들은 뭔가에 당했다는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쳤다. 스크린에는 레알 마드리드와 AC밀란 선수들이 긴장된 모습으로 하이 파이브를 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빨간색 별을 품은 초록색 맥주가 웃고 있었다.
이 거대하고 유쾌한 사기극(?)을 기획한 곳은 네덜란드 맥주 하이네켄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큰 축구 이벤트인 챔피언스리그에 맞춰 깜짝 몰래카메라를 준비한 것이었다. 챔피언스리그는 유럽축구연맹(UEFA)에 소속된 최고의 팀들이 참가하는 대회로 세계적인 팬덤을 보유하고 있다. 이 영상이 스카이 스포츠에 소개되자 수천만 명이 응원과 화답을 보냈다.
▲ 하이네켄 |
ⓒ 윤한샘 |
하이네켄이 펼치는 티켓 이벤트는 다채롭고 기발하다. 친구를 배신하고 축구장에 온 남자를 주인공으로 찍은 딜레마 편, 축구를 보기 위해 여자 친구에게 준 스파 티켓이 사실 챔피언스리그 결승 티켓이었다는 클리셰 편 등, 몰래카메라를 통해 깜짝 티켓을 선물하는 이벤트는 오랫동안 전 세계 축구 팬들에게 친근함과 웃음을 주었다.
축구팬들이 챔피언스리그 별과 하이네켄의 별을 동일 시 하는 건,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제 전 세계 수억 명의 축구팬들은 챔피언스리그 테마곡이 흘러나오면 자연스럽게 하이네켄을 떠올린다. 맥주가 스포츠와 연결되며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가치가 바로 이런 정서적 일체감이다.
하이네켄과 UEFA의 관계가 이 정도 수준이라면 가장 큰 스포츠 이벤트인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은 어떨까? 국제연합(UN)보다 가입국이 많다는 FIFA의 맥주 파트너는 안호이저 부쉬(Anheuser Busch)다. 두 공룡의 인연은 3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계약 규모는 7800만 달러(1034억)였다. 2026년 북중미 월드컵의 경우에는 무려 1억 1400만 달러(1512억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안호이저 부쉬는 사실 스포츠 마케팅을 개척한 브랜드다. 1953년 미국 프로야구 세인트 카디널스와 맺은 후원 계약이 최초의 맥주 스폰서십으로 알려졌다. 20세기 안호이저 부쉬가 꿰뚫은 이 통찰은 스포츠와 맥주 산업에 많은 변화를 몰고 왔다.
지역 스포츠 구단 후원이 상호 간 긍정적인 시너지를 일으킨다는 것이 증명되자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PL)와 미국 풋볼리그(NFL)까지 확대됐다. 맥주 브랜드뿐만 아니라 스포츠 구단과 협회도 서로 큰 이익을 봤다는 의미다. 도대체 맥주는 왜 스포츠와 궁합이 잘 맞는 것일까?
우선 맥주가 타 주류보다 낮은 알코올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스포츠를 관람하며 와인이나 위스키를 마시는 것은 성가신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이성보다 감정이 지배하는 경기장에 과도한 알코올은 부적절하다. 스포츠가 더 이상 마초들의 놀이터도 아니지 않는가.
맥주가 갈증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술인 것도 중요하다. 특히 라거의 청량감은 물을 대신해 본능을 충족시키고 긴장감을 지속시킬 수 있는 에너지로 작용한다. 야구 경기장에 비어맨이 있는 건, 약 4시간 남짓한 관람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햄버거나 바비큐 매출을 높이기 위한 파트너로도 맥주 외에 다른 궁합을 상상하기 어렵다.
맥주가 인류와 함께해온 보편적이고 문화적인 감성도 빼놓을 수 없다. 와인이 귀족의 술이었다면 맥주는 민중의 음료였다. 노동자 스포츠로 시작한 축구는 정서적으로 맥주와 같은 피가 흐른다. 전쟁터 같은 피치 위에서 계급장 떼고 맞붙는 축구와 통하는 술은 맥주밖에 없다.
선술집인 '펍'의 문화도 궤를 같이한다. 퍼블릭 하우스를 의미하는 펍은 노동자에게 유일한 놀이의 공간이었고 커뮤니티였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맥주를 마시며 삶을 이야기했고 정치를 논했다. 그리고 축구를 보면서 일체감을 느끼고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었다.
▲ 한국에 출시된 리버풀FC 30주년 칼스버그 맥주 |
ⓒ 윤한샘 |
리버풀 FC의 빨간색 유니폼에 있는 칼스버그 로고는 승리의 부적이었다. 1995년 리그컵 우승을 시작으로 2001년에는 UEFA 우승컵을, 이스탄불의 기적으로 불리는 2005년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빅이어를 차지하며 최고의 순간을 함께 했다. 2010년 비록 유니폼 스폰서는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에 양보했지만 둘은 지금까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리버풀 FC와 파트너십을 기념하기 위해 칼스버그가 창조한 맥주는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2017년 25주년 기념 맥주로 출시한 필스너는 각별했다. 칼스버그는 이 이벤트를 위해 특별한 홉을 준비했다.
연구원들은 리버풀 경기가 나오는 스크린을 실내 농장에 마련했고 홉이 자라는 동안 꾸준히 영상과 소리를 노출시켰다. 홉에 리버풀 FC의 영혼을 이식한 것이었다. 레드 홉으로 명명된 이 홉은 드라이 호핑 방식으로 맥주에 첨가됐다. 황금색 레드 홉 필스너는 리버풀 FC 팬과 같은 붉은색 심장을 품고 있는 맥주였다.
26주년 기념 맥주는 더 흥미롭다. 아예 붉은 보리를 이용해 필스너를 만든 것이다. 칼스버그연구소는 여러 품종을 개량한 끝에 붉은색 보리 재배에 성공했고 이를 리버풀 기념 맥주에 사용했다. 이 맥주의 색은 정말 붉다. 붉은 필스너를 마시는 리버풀 팬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가슴이 뛰고 눈물이 나지 않았을까?
파트너십이 30주년이 되던 2022년에는 제이미 캐러거를 비롯한 6명의 레전드 이름과 유니폼을 담은 맥주를 출시했다. 전 세계 리버풀 진성 팬들을 위한 선물이었다. 맥주이기 때문에 가능한 시도였고 맥주만이 할 수 있는 담대한 표현이었다.
▲ 2023년 파트너십을 맺은 수원 삼성과 칭따오 |
ⓒ 비어케이 |
▲ 알리안츠 아레나 파울라너 비어가든 |
ⓒ 윤한샘 |
'팬트레프'(Fantreff)는 팬 미팅 장소를 의미한다. 바이에른 뮌헨 공식 후원 맥주인 파울라너는 이곳을 비어가든으로 운영하고 있다. 긴 테이블과 의자 뒤에 걸린 TV에는 우승 후 파울라너를 마시는 선수들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흘러나온다. 방문객들은 자유롭게 앉아 파울라너 맥주와 전통 음식을 즐길 수 있다. 경기가 없는 평일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곤 한다.
바이에른 뮌헨의 경기를 보며 파울라너 맥주를 마시는 경험은 독특하다. 마치 파울라너가 뮌헨을 대표하는 맥주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굳이 뮌헨 팬이 아님에도 충성심이 스며들 정도다.
우리가 축구라는 공놀이에 열광하는 것은 초록색 잔디 위가 합법적인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피 대신 땀을 튀겨가며 치열한 경기를 하는 선수들은 전투가 끝나면 악수를 하고 결과를 인정한다. 관중석에서 그들과 아드레날린을 뿜었던 우리들도 휘슬 소리와 함께 다시 문명으로 돌아온다.
맥주는 가식이 사라지고 페르소나를 벗어버린 90분 동안 본능을 충족시켜 주는 술이다. 물론 그 안에는 절제와 이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야만과 문명의 경계는 생각보다 가깝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 중복 게재됩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도청 덮자? 문건대로 이미 진행된 '무언가' 있다
- 미 전투기와 '고추 말리기'를 위해, 또 공항을 짓자고?
- 양곡관리법 부결... 민주 "농민에 대못, 민심 역주행"
- 경북대 교수들도 윤석열 정부 규탄 "국격 맞는 대일관계를"
- "나쁜 남자 사연에..." 17년 차 라디오 작가가 즐겁게 일하는 법
- 양볼이 터질듯 욱여넣는 쌈채소의 지독한 매력
- 칼 내리꽂은 고기 덩어리, 먹는 방법도 전투적
- 바이든 '기밀 유출'에 "전면 조사 중… 현재 상황은 없어"
- 고등학생들 "세월호 다 끝났다? 진상규명 시작도 안했다"
- 이번주 윤대통령 외부일정 1회, 김건희 여사는 벌써 3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