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와의 만남] “황혼부터 새벽까지 다른 언어의 영혼과 대화”
번역은 기계적 변환 기술이 아니다. 다른 언어를 가진 영혼과의 대화이다. 영성을 다루고 신학을 다루는 책에선 더욱 번역이 중요하다. 챗GPT와 구글 파파고 등 인공지능(AI) 기술이 고도화된다 해도, 결코 따라올 수 없는 영성이 담긴 번역을 묵묵히 해내는 번역가 김순현(57) 여수 갈릴리감리교회 목사를 지난 10일 그의 서재에서 만났다. 김 목사가 평생 모은 3000권 시집이 늘어서 있는 서재는 영혼의 대화를 나누기에 적절한 장소였다. 저자와의 만남 대신 이번엔 역자(譯者)와의 만남이었다.
출판사 복있는사람이 최근 완간한 디트리히 본회퍼 대표작 세트 8권 가운데 김 목사는 ‘디트리히 본회퍼 설교집’ ‘성경의 기도서’ ‘나를 따르라’ ‘옥중서신-저항과 복종’ ‘창조와 타락’ 등 5권을 번역했다. 김 목사는 “본회퍼의 명쾌하고 명료한 생각을 우리말로 더 정확하게 옮기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출판사는 그가 번역문을 세 차례 정도 다시 쓰는 등 수도사와 같은 열정으로 번역에 임했다고 귀띔했다. 김 목사는 번역가의 일상을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목회가 1순위, 정원 가꾸기가 2순위, 번역이 3순위입니다. 번역은 해가 진 뒤 시작합니다. 유학을 준비하던 시절부터 하루 1시간 이상은 독일어나 영어 원서를 읽는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지금도 지킵니다. 제가 읽고 좋은 책을 주변에 나누고 싶어 번역 일을 시작한 겁니다. 밤늦게까지, 때론 새벽까지 번역에 임합니다. 낮에는 정원에 나가 풀을 뽑거나 가지를 치고, 한낮에는 땡볕을 피해 성서나 신학 서적, 시와 소설을 읽습니다. 해가 떨어질 무렵에야 다시 나가 정원에 물을 주는데 매일 2~3시간이 걸립니다. 이것저것 살피며 물을 주고 또 식물마다 물주는 방법이 다 다르므로 오래 걸립니다.”
그의 서재에서 창을 내다보면 말 그대로 낙원이 펼쳐져 있다. 300종이 넘는 꽃과 나무가 온갖 향기를 내뿜고 있다. 2004년 지금의 여수 돌산도에 내려올 당시 ‘ㄱ’자 모양의 교회와 사택 앞은 그냥 텃밭이었다. 이걸 김 목사와 사모, 성도들이 창조주를 떠올리는 정원으로 하나씩 손수 가꾸었다. ‘비밀의 정원’으로 이름 붙인 이곳은 국립수목원 선정 ‘가보고 싶은 정원 100’에 지정돼 매일 방문객이 찾아온다.
본회퍼 대표작 세트 이전에 김 목사는 에버하르트 베트게가 쓴 1468쪽짜리 전기 ‘디트리히 본회퍼’(복있는사람)를 1년 6개월에 걸쳐 번역했다. 20세기가 남긴 기독교 최고의 인물이라고 일컫는 본회퍼의 일거수일투족을 풀어내기 위해 하루 12시간씩 이 서재에 자신을 유폐시켰다고 김 목사는 밝혔다. 그는 “코로나 자가격리를 2014년 번역 당시 미리 해본 셈”이라며 “덕분에 시력 저하, 목과 어깨 통증, 전립선에 치질까지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시적 운율이 담긴 번역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책은 아브라함 헤셸의 ‘안식’이다. “안식일은 생명을 위해 있는 날이다. 인간은 짐을 나르는 짐승이 아니며, 안식일은 그가 하는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있는 날이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가운데 가장 마지막 작품이자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 가운데 가장 첫 번째 작품(last in creation, first in intention)인 안식일이야말로 천지창조의 목적이다.”
책의 59쪽 김 목사가 영어의 운율을 우리말로 최대한 살려 번역한 부분이다. 유대교 사상가 헤셸의 여러 책을 번역한 감리교 이현주 목사는 김 목사의 책에 대해 “잘 되었다. 스무 해쯤 전에 번역을 시작해 놓고 마치지 못했던 책이 믿음직한 후배의 튼실한 번역으로 세상에 나온다니, 참으로 반갑고 고마운 일”이라고 평했다.
최근 번역작은 서울 남포교회 출판부인 무근검의 ‘목자, 개, 양 떼’이다. 주님은 목자, 신자들은 양 떼, 목사는 양 떼를 지키는 개라는 점을 강조하는 책이다. 김 목사는 “루터교 안에서 50년 정통 목회를 한 저자의 경험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 번역을 맡게 됐다”면서 “목양견 역할에 충실한 목회자 모습이 강조된 책”이라고 말했다.
여수=글·사진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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