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의 시시각각] 미국 도청 문건에 분노하는 분에게
한국 155㎜ 포탄 수출 압박하기도
국제정세 고려 냉정하게 판단해야
“휴대전화로 얘기하면 미국만 듣는 게 아니라 몇 나라가 듣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미국의 기밀 유출 건이 불거진 후 전직 외교안보 인사 A에게 연락했다가 들은 말이다. 미국이 우방도 엿듣는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미국은 안 당하나. 그렇지 않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도청당했다는 사실이 공개된 뒤 독일이 펄펄 뛰었지만 독일도 백악관 등 미국을 상대로 첩보활동을 한 게 드러나기도 했다. 모두 능력껏 하고 능력껏 막는다. 그래서 A는 “도청이 잘못이 아니라 유출이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혈맹이라고 해놓고 도청할 수 있느냐” “용산 이전 때문에 당한 것”이라고 비난할 수 있으나 시야가 거기에만 머물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다. 실제 유출 문건이 드러낸 현실은 훨씬 복잡다단하다.
무엇보다 전쟁의 성격이다. 문건은 미 합참의 일일브리핑 같다(실제 2월 28일, 3월 1일자라고 했다).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 서구가 어떻게 우크라이나군을 훈련하고 무장시키는지 담겼다. 우크라이나 방공망은 물론 탄약고 사정까지 걱정한다. 모스크바의 공습 시기와 구체적 목표도 실시간 중계한다. 우크라이나의 선전이 서구 특히 미국의 자원 투입 덕분임을 명백히 보여준다. A는 “미국으로선 돈이 몇백억 달러가 들든, 자기들 피를 흘리지 않고 러시아가 유럽에서 다시는 팽창 정책을 펴지 못하게 쐐기를 박을 수 있다면 그것처럼 좋은 게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한국이 거론된다. 정확하겐 155㎜ 포탄 수출 여부를 두고서다. A의 설명이다. “냉전 이후 나토 국가 대부분이 최소 생산 라인만 남겨뒀다. 2008년 이후엔 국방비도 줄였다. 전쟁하는 동안 포탄이 다 떨어졌고, 포탄 가진 나라가 우리밖에 없게 됐다. 우리가 가졌다는 걸 모두가 안다. (서방에) 안 줄 방법이 없다. 러시아 모르게 준다? 불가능하다.”
영국 BBC의 분석도 유사하다. “워싱턴은 서울이 우크라이나를 무장시키길 바란다. 서울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좋은 무기를 생산해 내는 능력이 전쟁 결과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원이 전쟁의 향배를 좌우할 수 있다는 의미다. (방산 강국의 위력이다.) 미국 등 압박이 노골화하는 이유일 것이다. 응하는 게 도움이 될까. 한·미·일 안보 협력이 절대적이라지만, 그렇게 해서 중·러 관계를 대단히 꼬이게 한다면? '김성한-이문희 대화'에 담긴 고민이다.
윤석열 정부는 전쟁 지역에 살상 무기를 보내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최근 외신기자클럽 간담회에서 러시아 기자가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게 던진 질문에서도 묻어난다. “범진보 진영에선 윤 대통령의 외교 정책을 맹목적 친미로 비판한다. 실상 윤 대통령은 미국과 나토의 상당한 압력에도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을 안 하고 있다. 버티고 있다고 해야 맞는 표현이겠다. 칩4 동맹도 즉각 수락하지 않고 한국 자체 반도체 산업 비전을 밝힌 바 있다. 정치적 라이벌이지만 한 번쯤 좋게 평가해 줄 수 없나.”
윤석열 정부는 이후 대여 형식으로 미국에 50만 발을 보내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당국자는 “전쟁이 계속되면 또 요구할 것”이라고 했다. 앞으로 어찌해야 하나.
미국의 ‘1급 비밀(top secret)' 배포선도 주목할 만하다. 워싱턴포스트가 유출자를 ‘보안시설에서 일한다고 과시한 20대 총기광’이라고 특정했던데, 실제 1급 비밀을 120만~130만 명이 본다고 한다. 9·11 테러 이후 정보를 더 빨리, 더 넓게 공유되도록 바꿔서라고 한다. 그만큼 유출 가능성도 커졌다. "이런 일이 영국이나 이스라엘·독일·호주에서 벌어졌다면 미국은 정보 공유를 완전히 중단했을 것"(이코노미스트)이지만, 이번 일로 미국과 정보 공유를 중단할 나라는 없을 것이다. 현실이 그렇다.
진정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국익을 지켜내기 위해 복잡한 걸 복잡하게 봐야 한다. 냉정할 때다.
고정애 chief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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