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해 소식…DJ 첫마디는 '이러면 안되는데'였다" [고대훈의 직격인터뷰]
김홍업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아버지가 국민에게 어떤 대통령으로 기억된다고 보는가”라고 묻자 “김대중 하면 ‘인동초(忍冬草)’ ‘투옥’ ‘망명객’ ‘투쟁’과 같은 과거 어두운 시절의 투사적 인상에 갇혀 있다”며 약간 불만을 표했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라는 질문에는 “저에겐 무뚝뚝한 분이었다. 남아 있는 아버지 사진 중에는 웃는 모습이 별로 없다. 찡그리거나 화난 표정이 많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거짓말 잘하는 사람’ ‘빨갱이’라는 왜곡된 이미지를 걷어내고 아버지의 참모습을 알리고 싶다”고 했다.
김홍업(73)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은 “생전에 남기신 아버지의 목소리를 세상에 들려줘 김대중 개인의 발자취와 정치적 성취에 대해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대중(DJ, 1924~2009) 전 대통령은 2003년 2월 청와대를 나와 서울 동교동으로 돌아간 뒤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서 2006년 7월부터 2007년 10월까지 15개월 동안 자신의 일생에 관해 구술(口述)을 했다. DJ는 이 구술 과정을 생생한 육성과 함께 동영상으로 남겼다. 동영상의 의미에 대한 김 이사장의 설명이다.
“사형수, 망명, 대통령 당선…DJ 인생은 대하드라마”
“아버지의 인생은 한 편의 대하 드라마 못지않다. 1971년 박정희 전 대통령에 맞선 야당의 대통령 후보, 80년대 ‘내란 음모 수괴’의 사형수, 반복된 투옥과 연금, 국외 망명 등 숱한 고초 끝에 대통령이 되는 대반전을 곁에서 지켜봤다. 그야말로 격동의 우리 현대사를 목격하는 느낌이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정치에 뛰어들었다’고 하셨다. 이를 위해 아버지가 헤쳐온 시간을 되돌아보고 추구했던 가치와 인간적 면모를 알릴 때라고 생각한다.”
중앙일보는 DJ의 육성 영상과 녹취를 입수해 면밀히 검토했다. DJ가 삶의 막바지에서 돌아본 80여년의 파란만장한 여정은 개인적 기록이자 역사의 교훈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판단, 연세대 김대중도서관(관장 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의 협조를 얻어 연재하기로 했다. 육성 회고록 전체를 시기와 주제별로 나눠 이달 24일부터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The JoongAng Plus’(중앙일보 프리미엄 디지털 구독 서비스)에 하나씩 공개한다.
DJ의 차남인 김홍업 이사장을 7일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만났다. 김 이사장은 1982년 DJ의 미국 망명 때 동행했고, 97년 대선에서 홍보 기획을 담당하는 등 아버지를 지근에서 보좌했다. 2007년 무안·신안 보궐 선거(17대)에 출마해 당선돼 잠시 정치에 몸을 담기도 했다. 2019년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에 취임해 DJ의 업적을 기리는 사업을 하고 있다.
-영상의 분량은.
“1회에 한 시간 남짓 모두 41회에 걸쳐 41시간 분량이다. 구술 녹취를 풀면 25만자에 달할 정도로 방대하다. 동영상 촬영 당시 아버지는 매주 세 번씩 투석하는 고통스러운 상태였지만 정장을 입고 곧은 자세를 취한 채 시련과 영광의 시간들을 또렷이 기억해 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 ‘영상 구술 자서전’을 남기는 처음으로 안다.”
“문화 개방 등 일본에 미래지향적 관점으로 접근했다”
-어떤 내용이 담겼나.
“출생에서 대통령 재임 기간까지 생애 전반을 회고했다.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과 분단, 군사 독재와 민주화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대를 관통한다. 특히 1954년 정계에 투신한 이후 야당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운명적 대결(71년), 도쿄 납치사건(73년),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과 민주화운동(80년~), 네 번째 도전 끝에 성취한 대통령(98~2003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2000년) 등 아버지가 들려주는 사건들의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맞물려 있다.”
-아버지에 대한 사회의 평가가 인색하다고 보는가.
“민주화 운동은 물론이고 남북 평화, 4강 외교, 정보기술(IT), 일본 문화 개방 등 긍정적 업적이 많다. 그런데 일부지만 ‘빨갱이’ ‘용공’이라는 터무니없는 주홍글씨가 여전히 맴돈다. 1971년 7대 대선에서 평화공존-평화교류-평화통일의 3단계 평화통일론과 향토예비군 폐지를 공약했는데 이때부터 빨갱이라고 매도하기 시작됐다. ‘김대중이 장구 치면, 김일성이 춤춘다’는 얘기까지 돌았다. 빨간 넥타이를 맸다고 빨갱이라고 세뇌하던 암울한 시절이 있었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고 나는 서울 남산에 있던 중앙정보부 취조실에 끌려가 ‘아버지가 빨갱이’라고 자백하라며 100여일 동안 취조를 당했다. ‘아버지를 새벽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는데 빨갱이 짓 하는 걸 본 적 없다’며 끝까지 버텼다.”
박정희 유고 소식에 "안 되는데…"
-권위주의 정권에서 용공 조작과 탄압에 시달렸다.
“2004년 8월 12일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김대중도서관으로 찾아와 아버지에게 사과했다. ‘박정희가 환생해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았다. 내가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고 말씀하시며 감격했다.”
-아버지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었나.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된 10·26사태가 발생한 이튿날 새벽 4시쯤 미국에 있던 지인이 내게 전화를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고’라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바로 말씀드렸더니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담배를 달라고 했다. 금연 중이었는데도 두 대를 연거푸 피면서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라고 되뇌었다. 폭력과 시해를 당하는 방식으로는 민주화가 안 된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 유고를 확인한 뒤 ‘애도한다. 북한은 오판 말라’는 성명을 내라고 했다. 20년 가까이 탄압을 받고 정적으로 지냈지만 두 분이 직접 얼굴을 마주친 것은 청와대에서 열린 의원 초청 신년회 등 딱 두 번밖에 없었다.”
“남북정상회담, 미국에 숨소리도 알리라 하셨다”
-북한의 핵 개발과 위협으로 ‘햇볕정책’이 퇴색하고 있다.
“햇볕정책은 아버지가 작명한 게 아니다. 어느 날 신문에서 쓰기 시작한 용어가 아버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한반도 지도를 바다를 향해 거꾸로 보라고 했다. 삼면이 바다인데 뚫고 나가자는 의미다. 우리가 대륙에 진출하면 경제적 이득이 크다고 봤다. 남북이 같이 잘 살 수 있어 굳이 싸울 일이 없을 거라 하셨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북한에 특사를 자처해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것이다.”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 과정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있나.
“아버지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미국에 남북 간 숨소리 하나라도 다 알려주라고 지시했다. 북한에 대해서 노력하면서 키(남북 관계를 해결하는 핵심 역할)는 미국이 쥐고 있다고 판단했다. 털끝만큼의 비밀도 없어야 미국이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과 보좌진을 그렇게 설득했고,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냈다. 그런 투명성이 북한에도 신뢰감을 줬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한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소환되고 있다.
“당시 일본에 대중문화가 개방되면 사무라이 문화도 들어와 한국 문화가 말살될 우려가 있다는 반발이 컸다. 그러나 아버지는 ‘문화라는 게 원래 나쁜 거부터 들어오긴 하지만, 한국의 문화예술적 잠재력이 더 크다’라고 했다. 실제로 한류가 먼저 일본을 뒤집어 놓았고, 세계가 주목하게 됐다. 한일 관계를 그런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DJ 빈소에 조문했다.
“장례식 뒤 연희동(전두환 전 대통령 사저)에 인사를 갔다. ‘김대중 대통령 재임 때 내가 가장 행복했다’고 하더라. ‘당신, 나에게 신세 졌어’라는 말도 했다. 내가 장가가는 걸 허락해줬다는 의미였다. 감사위원이던 장인이 나와의 결혼 때문에 사표를 냈는데 전두환씨가 사표를 반려했고, 우리 부부가 있던 미국에 장인·장모를 보내줬다고 한다. 원한이 있었지만, 이제는 사라졌다.”
“박사 학위 받았을 때 가장 기뻐했다”
-DJ가 가장 기뻐하던 장면은.
“1992년 러시아 외무성 산하 외교대학원으로부터 논문 심사를 통과해 정식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였다. 최종 학력이 목포상고 출신이라서 학업에 대한 아쉬움을 품고 계셨다. 아버지와 가까웠던 미국 하버드대 라이샤워 교수는 아버지에게 ‘당신이 대학을 안 나왔으니 김대중이지, 대학을 나왔으면 교수나 하고 있었을 거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 위대한 사람이 됐다’고 말했다.”
-올 2월 전직 대통령 2세(박지만·노재헌·김현철)들과 만났다는데.
“어머니(이희호 여사) 장례식에 참석한 노재헌(노태우 전 대통령 장남)씨와 식사하며 (2세들) 안부를 물은 적 있다. 박지만(박정희 전 대통령 장남)씨가 지난해 11월 김영삼 전 대통령 7주기 추도식에 참석했고, 같이 식사나 하자고 했다. 그분(2세)들도 부친을 모시면서 좋은 시간도 있었겠지만, 그늘도 있다. 아버지 기념관 운영에 관한 고민들을 나눴다. 다음엔 김현철(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씨와 박씨가 돌아가면서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다.”
“탄생 100주년 맞춰 일대기 영화 제작 중”
-전직 대통령 기념사업에 어려움이 많다고 하던데.
“미국에서는 대통령 기념관이나 도서관에 정부 예산 지원이 지속해서 이뤄진다. 그런데 한국에선 건립할 때만 매칭펀드(민관 공동자금 출자) 형태로 도움을 받고 그만이다. 기념사업을 유지하는 데 재정적으로 고충이 있다. 학술, 발간, 연구, 전시 등에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
-구상 중인 DJ 기념사업은.
“내년이 아버지 탄생 100주년이다. 김대중평화센터에서 석학들을 초청해 ‘김대중 평화회의’를 하고, ‘김대중 다큐멘터리’ 영화를 명필름과 공동으로 제작중이다.”
대담=고대훈 기획취재국장, 정리=강병철 기자 bong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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