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배의 시선]창고행 쌀, 계속 살 수는 없다

김원배 2023. 4. 14.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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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 매입은 쌀 생산 감축과 상충
곡물 대책 마련은 국가적 과제
정쟁 떠나 실질적 대안 논의 필요
김원배 논설위원

벼, 쌀, 밥. 식물과 열매, 먹을 수 있게 된 상태를 각각 표현한다. 단어가 따로 있을 정도로 한국인에겐 특별한 존재다. 50원짜리 동전에도 벼 이삭이 들어가 있다. 1972년 식량 증산의 염원을 담아 제작됐다. 당시 보급된 통일벼는 생산량을 30% 늘리는 획기적 품종이었다. 정부 행정력이 동원돼 재배를 확대됐고 77년 식량 자급을 달성한다.

하지만 지금은 쌀이 남아돌아 문제다. 소비량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1992년 112.9kg이던 1인당 쌀 소비량은 지난해 56.7kg으로 줄었다. 30년 만에 딱 절반이 됐다. 수요가 줄면 가격이 내려가야 정상인데 쌀은 농민의 핵심 수익원이기 때문에 그렇게 내버려 둘 수가 없다.
더불어민주당이 일방 처리했다가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13일 국회 본회의 재투표에서 부결됐다.

국회의원들이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05회국회(임시회) 제4차 본회의에서 '양곡관리법 일부개정법률안 재의의 건'에 대한 무기명 투표를 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 재투표에서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최종 부결됐다. [뉴시스]

개정안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초과 생산된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사들이는 조항과 논에 다른 작물을 심었을 때 정부가 재정 지원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지난해 쌀값이 20%나 하락했는데도 기존의 임의 매입으로 효과를 보지 못한 만큼 의무적으로 사들여야 한다는 게 민주당의 주장이다. 타작물 지원금으로 쌀 재배가 줄어드니 전체적으로 큰 부담이 안 될 것이라는 점도 내세운다. 반면 주무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는 쌀 대신 다른 작물로 전환해야 하는 마당에 의무 매입 조항을 넣으면 안 된다고 반대했다.

쌀 의무 매입과 다른 작물 재배 유도는 상충하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다른 작물을 심었을 때 주는 지원금이 많으면 쌀 재배가 줄겠지만 이게 충분하지 않으면 의무 매입을 하는 쌀농사를 유지할 가능성이 있다. 재배 면적이 줄어도 단위 면적당 생산이 늘어나 전체 생산량이 많이 증가할 수도 있다. 자칫하면 돈을 쓰고도 소기의 목적 달성을 못 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농민 입장에선 쌀값을 안정시킬 확실한 장치를 원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변화가 필요한 분야에 경직된 제도가 도입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4일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용인시농협쌀조합공동사업법인 저온저장고에서 관계자가 가득 쌓여 있는 벼 포대를 살펴보고 있다. [뉴시스]

남는 쌀 매입은 보관 비용도 만만치 않다. 또 해당 쌀은 몇 년 뒤 매입한 가격의 10~20% 정도에 과자용이나 사료용 등으로 처분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보관은 비싸게 산 쌀을 낮게 팔 명분을 축적하는 과정일 뿐이다. 이게 벼를 재배하는 농업의 본질인지 의문이 든다.

소비가 줄었지만, 쌀이 주식인 상황에서 농업에 지원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 식량 안보 차원에서 주식 생산 기반을 유지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느 수준까지 할 것이냐에 대해선 정치권과 정부 모두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국내 1인당 밀 소비량이 30kg을 넘는 등 꾸준히 늘고 있지만, 자급률은 1%에도 못 미친다. 일본의 경우도 한국과 비슷하지만 밀 재배에 꾸준히 노력해 자급률이 10%를 웃돈다. 상당한 예산을 투입한 결과다. 농식품부는 가루를 내기 쉬운 가루쌀 재배를 확대하겠다는 입장이지만, 국내 밀 재배 농가는 지원에서 소외돼 있다며 불만이다.

정부 대응에도 아쉬움이 있다. 민주당이 지난해부터 양곡관리법 처리 움직임을 보였는데 의무 매입 반대라는 원칙만 강조하는 데 치중했다. 정부를 믿지 못하는 농민을 효과적으로 설득하지 못했다. 농식품부는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이후인 지난 6일 종합 대책을 내놨다. 올해 쌀값이 20만원(80kg 기준) 수준이 되도록 하고 농가 직접지원금은 2027년 5조원으로 확대하는 내용이다. 다만 구체성이 떨어지고 기존 나온 대책을 모은 ‘재탕’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대통령 거부권 반대 및 쌀값 정상화법 공포 촉구 결의대회'가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열렸다. 더불어민주당 신정훈, 이원택 의원(왼쪽 세 번째부터)과 농민단체 회원들이 양곡관리법 개정안 공포를 촉구하며 삭발을 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최종 부결됐지만 중장기적인 곡물 대책을 어떻게 마련해 실행하느냐는 국가적인 과제다. 예산을 쓰더라도 효율적이고 장기적인 방향에 맞게 집행돼야 한다. 민주당도 구체적인 대안을 내야 한다.

요즘 대학가에선 ‘1000원의 아침밥’이 퍼지고 있다. 쌀 소비 확대를 위해 농식품부가 끼니 당 1000원을 지원하면, 대학 당국이 재원을 마련해 학생에게 1000원에 아침을 제공하는 사업이다. 2012년 순천향대에서 시행한 것인데 농식품부가 예산을 지원하면서 대학가의 히트 상품이 됐다. 양곡관리법으로 대립하는 여야도 모처럼 같은 목소리를 낸다.

쌀 문제 해결도 여기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제한된 예산을 투입하되, 자율적으로 참여하고 관련 주체가 비용을 분담한다. 이를 통해 농민에게 신뢰를 주고 쌀 소비자에게도 유익한 그런 방안을 끈기 있게 찾아내야 한다.

김원배 논설위원 oneby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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