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남자 사연에..." 17년 차 라디오 작가가 즐겁게 일하는 법
'전지적 작가 시점'은 늘 카메라 뒤에 서 있지만 방송국 구석구석을 누비는 방송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오수미 기자]
▲ KBS 쿨FM <헤이즈의 볼륨을 높여요> 고지양 작가(오른쪽) |
ⓒ 고지양 |
"오늘 방송에서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었다면, 좋은 방송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로 그날 있었던 나쁜 일을 잊을 수도 있지 않나. 오늘도 누군가의 기억에 하나 남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매일 오후 8시에 방송되는 KBS 라디오 쿨FM <헤이즈의 볼륨을 높여요>를 만드는 고지양 작가는 올해로 17년 차 라디오 작가다. 그는 오전 9시에 방송되는 KBS 쿨FM <이현우의 음악앨범> 팀에서 3년 정도 일하다가, 지난해부터 오귀나 PD와 함께 <볼륨을 높여요>에 합류했다고.
고지양 작가는 요즘 DJ 헤이즈와 함께 일하는 매일이 즐겁다고 전했다. 그는 "우리가 아무리 재미있는 방송을 준비해도 DJ가 기분이 안 좋다면 재미있게 소화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서 DJ가 기분이 좋으면 제작진도 덩달아 신난다"며 "요즘 헤이즈가 늘 '힐링하러 출근한다', '너무 좋다'고 해서 우리도 함께 재밌게 일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7일 서울 종로구 모처에서 고지양 작가를 만났다.
라디오는 DJ 스케줄에 따라 제작진의 스케줄도 변동되는 편이다. 녹음하는 날과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날이 DJ의 일정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이다. 고 작가는 "보통 주말 방송분은 미리 녹음하고, 평일에는 나흘에서 닷새 정도 생방송을 진행하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볼륨을 높여요>의 DJ 헤이즈가 지난 5일 새 싱글 앨범을 발매하면서 컴백 일정을 소화하느라 며칠의 방송분 녹음을 하루 만에 따기도 했단다. 고지양 작가는 "(그럴 때는) 당일 생방송을 끝내고 나면 다음날 출근하기 전까지 계속 대본을 쓴다. 일찍 끝내고 쉴 수 있는 날도 있지만 생각이 안 나는 날은 새벽까지 붙들고 있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작가가 사연을 각색하는 방향은 언제나 'DJ가 가장 잘할 수 있도록, 제일 재미있게 이야기할 수 있게'다. 대본을 쓰고 준비하는 사람은 작가이지만 그걸 청취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역할은 DJ이기 때문. 고지양 작가는 "DJ가 뭘 잘하고 어떤 걸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어느 DJ랑 일을 하더라도, DJ의 관심사에 내가 전혀 관심이 없다면 그 방송은 재미없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최대한 (DJ와) 동기화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부터 <볼륨을 높여요>의 주인이 된 헤이즈는 '연애' 주제를 가장 좋아한단다. 고 작가는 "연애에 관한 사연이 오면, 게스트에게 우리 상황극을 해보자고 적극적으로 제안하기도 하고 주거니, 받거니 의견을 나누는 걸 정말 좋아한다. 나쁜 여자, 나쁜 남자에 관한 사연을 읽을 때는 분노를 참지 못하기도 하고(웃음). 이렇게 하라고 몸소 연기를 하면서 보여주기도 한다. 늘 청취자들의 사연에 100% 몰입해서 이야기하는 편이다"라고 귀띔했다.
요즘은 KBS 공식 홈페이지부터 애플리케이션 콩, SNS, 문자까지 시대가 달라진 만큼 사연이 쏟아지는 경로도 다양해졌다. 고지양 작가는 "실시간으로 방송을 들으시면서 보내기 편해서 그런지 문자로 오는 사연이 가장 많다"면서도 "요즘도 정성껏 꾸민 엽서가 방송국으로 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감성적인 면이 있어서 그런지, 헤이즈 DJ가 엽서를 너무 좋아한다. 특별한 내용이 담긴 것은 아니지만 손글씨와 문자는 느낌이 다르지 않나. '이런이런 일이 있는데 응원해 주세요', 혹은 '위로해 주세요' 같은 내용이거나 아니면 헤이즈를 응원하는 편지일 때가 많다. 그러면 너무 신기해하고 좋아하더라. 그래서 방송에서 소개하면 또 그때는 엽서로 많이들 보내주신다"고 전했다.
▲ KBS 쿨FM <헤이즈의 볼륨을 높여요> 고지양 작가 |
ⓒ 고지양 |
인터뷰 전날인 5일에는 <볼륨을 높여요>가 코로나 19 이후 오랜만에 공개방송을 진행해 정신없이 바쁜 한 주를 보냈다고.
고지양 작가는 "헤이즈 DJ의 첫 공개방송이라 한강에서 벚꽃도 구경할겸 (방송을) 보러 오시면 좋을 것 같아서 여의도에 공연장을 잡았다"라며 "그런데 그날 비가 왔다. 미리 일기예보를 보고 강수확률을 계속 확인했는데 결국 이틀 전에 실내 공연장으로 급하게 옮기느라 너무 바빴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갑자기 바뀐 상황에도 공연장을 찾아준 청취자들, 팬들을 만나는 순간 그동안의 노고가 싹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고 작가는 "이런 사람들이 듣고 있구나, 많이들 좋아해 주시는구나 느낄 수 있는 현장이었다. 나까지 기분이 좋아지는 날이었다"고 덧붙였다.
고지양 작가가 라디오의 세계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15년 전인 2008년이었다. 당시 SBS 예능 프로그램 < TV 동물농장 >으로 작가생활을 시작한 고지양 작가는 6개월여 만에 라디오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이에 대해 고 작가는 시간을 한참이나 거슬러가며 설명했다.
"사실 어릴 때부터 라디오를 정말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SBS 파워FM <클릭비의 영스트리트>를 매일 들을 정도로 엄청 팬이었다. 어렸을 때는 듣기만 하다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쯤부터 사연을 보내기 시작했다. 보내는 족족 방송에 소개가 됐고 그게 너무 재미있었다. 내 얘기가 방송에 나오니까. 그때는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진 못했고 '너무 재밌다, 너무 좋다' 하면서 점점 빠져들었다. 매일 라디오를 듣고 방송에도 많이 소개되니까 당시 작가님이 저를 기억하실 정도였다. 그게 인연이 되었다. 제가 <동물농장> 작가로 일하다가 라디오로 옮길 때 작가님이 '너 라디오에 와 볼래?' 해서 옮기게 됐다. 중학교 때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생겨난 인연이지."
라디오국으로 와서 그가 가장 처음 맡은 일은 SBS 러브FM <김성진, 남성진의 좋아좋아>라는 프로그램의 막내 작가였다. 당시를 회상하며 고지양 작가는 "저는 라디오가 너무 좋았고 너무 하고 싶었기 때문에, TV 프로그램을 처음 맡았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기분이었다. 의욕이 넘치던 시기였다"며 "청취자 분들이 보내주신 사연을 A4 반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매일 다듬는 일을 했다. 그걸 또 선배 언니에게 검토받고. DJ와 게스트의 사진을 찍어서 포토샵을 거쳐서 홈페이지에 올리고, 게스트 스케줄을 체크하고, 생방송에서 실시간으로 오는 사연 고르고 그랬지. 그때는 서포트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이어 고 작가는 막내 작가가 해야 했던 일들 중에서 특히 전화 연결이 특히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털어놨다.
"전화라는 건 (상대방이 안 보이니까) 어떤 사람일지 모르지 않나. 그땐 막내 작가가 전화 연결을 담당했는데, (전화연결 신청 사연들 중에서) 사연을 고르고 그 사람과 미리 통화하면서 교육하는 역할을 했다. 방송 직전까지 그 사람의 기분을 끌어올려서 생방송에서 떨지 않고 즐겁게 얘기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게 내 일이었다. 방송에 3~4명을 전화 연결하려면 그 전날에 20명 정도에게 전화를 돌려야 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끌어내고 어떤 식으로 얘기할지 연습도 함께 했는데 '너무 떨려요, 저 못할 것 같아요' 밤늦게 연락도 오기도 하고 갑자기 잠수 타는 사람도 있고 그랬다. 그러다가도 '저랑 얘기한 것처럼 편하게 하면 된다'고 달래고 응원해 주면 다시 잘하시는 분들도 있고. 예전엔 라디오에 노래자랑 코너도 많았다. 그러면 미리 전화해서 '그 곡은 오늘 다른 분이 불러서 안 된다'라고 선곡도 다시 하고 노래 연습도 도와주고 그랬다."
▲ KBS 쿨FM <헤이즈의 볼륨을 높여요> 고지양 작가 |
ⓒ 고지양 |
이후 고지양 작가는 아침 프로그램인 <이현우의 음악앨범>부터 오후 4시 <붐의 영스트리트>, 오후 6시 <박소현의 러브게임> 등 다양한 시간대를 오가며 여러 청취자들과 소통했다. 실제로 <영스트리트>의 작가가 됐을 때는 특히나 감회가 새로웠단다. 그는 "내가 <영스>를 들으면서 자랐는데 <영스>를 지금 하고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신나서 일을 했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 일 말고 다른 꿈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더 좋았다"고 말했다. 이어 고 작가는 다양한 시간대의 프로그램에서 일하면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라디오를 듣는구나' 느낀다고 했다.
"문자를 받을 때 보면 20대부터 40대까지가 보통 가장 많긴 하다. 그렇지만 '저는 초등학생인데 엄마랑 듣고 있어요'라고 하기도 하고, '저는 80대예요'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다. 청취자의 폭이 정말 넓다고 느낀다. 그렇다 보니 초등학생이 들을 수 있으니까 너무 수위 높은 이야기는 하면 안 되고, 어르신들도 듣고 계시니까 너무 유치한 이야기를 하지도 않으려 한다. 이 세대도 아우르고 저 세대도 아우르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물론 10대가 라디오를 듣는 건 보통 또래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듣는 건 아니더라. 자기보다 어른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다. 어르신들도 '요즘 젊은이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서 듣는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다양하게 아우르려고 하면서도 주로 2040의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하는 편인 것 같다."
라디오 제작진의 일이란 결국 청취자의 하루 일상을 듣고 공감을 전하고 함께 소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의도하지 않았던 말 때문에 항의 문자가 오는 경우도 있다고. 고지양 작가는 "DJ의 감정과 듣는 사람의 감정이 다를 때가 있다. DJ가 어떤 이야기를 하면서 살짝 웃었다고 '좀 더 세심하셨으면 좋겠다'는 식의 문자가 오기도 한다. 모두가 그렇게 느끼지는 않으셨겠지만 한 사람이 불편했다고 하면 제작진은 그날 방송 끝날 때까지 그 말이 마음에 남는다. 그래서 더 신경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더 많은 사람이 고개 끄덕이고 공감할 수 있는 방송을 지향한다고 강조했다.
"라디오는 소리만 들리는 매체여서 그런지 단어 하나에도 감정이 움직이기도 한다. 어떤 상황에 처한 사람이든, 얼마나 힘든 사람이든 무난하게 들을 수 있는 방송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단어 수위를 조절할 때도 많다. 단어가 귀에 딱 꽂히면 사람이 그것만 생각하게 될 수도 있지 않나. 우리는 그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럴 땐 항의 문자를 방송 끝날 때까지 보내시기도 한다. 누구의 마음도 다치지 않게 하려고 한다.
한없이 웃고 까불지도 않고 너무 분위기를 가라앉히지도 않으려 한다.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은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서 떠들 수 있는 에너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나가 놀지 않을까. 보통 차분해질 때 라디오를 더 찾게 되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살짝 건드릴 수 있는 정도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우리도 다들 그래'라는 식으로 공감할 수 있는 방송을 만들려고 한다. 그 사람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게 만들고 싶다. 기분 좋은 이야기는 한없이 해도 되지만, 우울한 종류의 이야기는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하지 않으려고 하는 부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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