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낮으면 용접이나" 이 말 들은 용접공의 무심한 반응 [변방에서 안방으로 : 일하는 사람책]
일하는 사람의 기록을 담은 책을 소개한다. 송곳이 되어 준 작가의 경험과 필자의 지금을 들여다보아 변방에서 안방으로 자리를 넓혀 먹고사는 오늘의 온도를 1℃ 올리고자 한다. <기자말>
[최문희, 고정미 기자]
새로운 동네로 이사갈 때 생필품을 챙기듯이 확인하는 장소가 있다. 도서관, 병원, 슈퍼, 우체국 그리고 철물점이다. 잊을 만하면 주상복합 상가와 오피스텔이 들어서는 서울에 살면서 의외로 보기 힘든 곳이 철물점이다. 청계천 혹은 천호동에는 공구상가가 그나마 밀집돼 있지만 젊은 직장인들이 주거하는 역세권에는 철물점이 흔치 않다. 마스크부터 면장갑, 펜치, 나사못, 드라이버, 페인트까지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산업용품을 판매하던 공구 가게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도시 재정비사업과 대형마트에 밀려나고 있다.
제로 웨이스트까진 못 되더라도 물건을 오래 쓰는 것이 습관인 우리 집은 부엌 선반 마지막 칸에 다양한 공구를 구비한다. 콘센트 커버가 벗겨졌을 땐 나사못을 조여 감전을 방지하고, 빨래건조대가 휘어졌을 땐 공구 가방을 꺼낸다. 잡고, 비틀고, 테이핑한 건조대는 몇 년을 거뜬히 더 썼다. 책가방에 줄자를 갖고 다니며 가구를 들이거나 가게를 옮길 때 내부 평수를 측정해 공간별로 무엇을 둘지 계산한다. 이 생활 공구들은 모두 철물점에서 사온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공구를 파는 전문가, 공구상이 있다.
▲ 책 <오늘부터 공구로운 생활> |
ⓒ 라이킷 |
'힙스터의 성지' 성수동에서 '쇠 냄새 풀풀 나는' 현장을 쏘다니며 한식뷔페와 믹스커피 맛을 알싸하게 맛본다. 두꺼운 공구 책과 카탈로그를 공부하길 주저했다가 차츰차츰 공구의 세계에 애정을 쌓기 시작한다.
"자기 기술에 자부심 있으니까 그런 거지."
아버지의 한마디는 덤덤했다. 갈고 닦은 기술로 무던히 자신을 일으켜 세워온 사람들은 정작 무지렁이가 함부로 내뱉은 편견 어린 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일에 집중하며 타격감 따위는 받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현장직 기술자들의 땀에 기대어 우리가 편리하게 살고 있다는 보편적인 사실을 왜 배운 머리로 여전히 망각하는지 의뭉스러울 뻔했다가, 저자가 아버지의 답변을 언급한 대목에서 묘하게 가슴속이 시원해졌다.
저자는 고도의 기술이 스미는 현장을 오가며 "우리가 타고, 뛰어넘고, 착지하고, 잡고, 눕는 모든 것에, 살기 위해 용접이 쓰인다"라고 강조한다. 세상의 수많은 용접공에게 경외감을 가졌음을 물론, 톱니바퀴 맞물리듯 함께 공생하는 거래처인 '업계'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 마음은 자신을 연마하며 기술자들의 자부심을 공구상으로서 알려야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진다.
저자에 따르면 공구상은 "(산업) 제품의 종류, 브랜드를 알려주는 큐레이터"로서, "기술자가 말하면 찰떡같이 알아듣고 (제품을) 추천해주는 전문가"이다. 한편으로는 장인정신으로 한길을 개척해온 소상공인과 거래를 모색함으로써 사람들이 몰랐던 우수한 제품을 홍보하고 산업의 파이를 확장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하루종일 방방곡곡을 돌며 납품업체와 거래를 잇고 신규 업체와 안면을 트는 공구상들이 가게 다음으로 오래 상주하는 곳은 고속도로다. 이들은 꼼꼼히 체크한 견적서와 제품을 싣고 산업 현장으로 속력을 내어 달려가곤 한다.
실제로 책에는 안전복부터 공구함에 이르기까지 31종의 공구에 대한 길잡이가 담겨 있다. 저자는 국내부터 해외까지 각 산업용품의 브랜드별 사양과 특징을 세밀하게 알려주는데, 가령 망치와 장도리를 알려주는 장을 살펴보자. 볼망치(집중 타격 시), 고무망치(가구 조립 시), 우레탄 망치(타일 시공을 할 때), 무반동 망치(무거운 작업 시) 등 재질에 따라 상황별 다양한 쓰임을 조목조목 짚어준다. 나날이 기술력을 향상하는 국내 브랜드별 추천 품목, 공구상을 처음 시작할 때 '알면 좋은 산업용품 용어'도 빠트리지 않고 실었다.
국내에 공구상가가 움트고 발전하기 시작한 시기는 1970년대. 청계천 복개 공사가 마무리되고 공구상가 일대에 활기가 감돌며 산업 열기가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공구상 1세대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공구와 산업용품을 납품하고 수리까지 책임져왔다. 대개 1인 기업으로 꾸려졌기에 가족이 함께 두 팔 걷어 운영하거나 자녀에게 물려주는 경우가 흔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어쩔 수 없이 물려받은 고장 난 물건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고칠 수 있는 살림이다. 그렇게 흐름이 바뀌고 공기가 바뀌고 마침내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는 나, 세상으로부터 떳떳하게 대우받는 공구상이기를 오늘도 바란다."
공구 가게의 셔터를 힘차게 올릴 수 있도록
DIY가 대세인 요즘, 메이커 운동(데일 도히티가 고안한 개념으로, 스스로 만드는 사람들을 '메이커(Maker)'라고 정의한다)이 심심찮게 각종 문화공간 사업에 적용된다. 제품의 재질, 색, 모양을 자유자재로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고객 맞춤형 마케팅도 빈번해졌다. 메이커 운동이 시민사회에 도입된 시기가 2005년인 점을 감안하면, 누구나 '메이커'가 될 수 있도록 조력해온 철물점 그리고 공구상들은 이미 일찍이 우리 곁에 자리해왔던 셈이다.
<반려공구>에서 공구의 존재를 예찬한 저자 모호연은 "물건의 수명을 늘리는 방법을 하나씩 배워가는 동안에 공구가 늘 있었음"을 상기한다. "공구를 좋아하는 것은 공간에 잠재된 가능성을 생각하고 끄집어내는 일"이라며 동네 철물점을 마주하는 일을 반가워한다. 뚝딱뚝딱 무언가를 제조하는 기술 도구로서의 공구도 유의미하지만, 있던 것을 계속 쓸 수 있도록 도왔던 공구의 역할도 더욱 재조명돼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공구야말로 리사이클을 가능케 하는 생활 밀접형 도구일 것이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서울시는 매해 〇〇상사, 〇〇공업사, 〇〇철물점 등이 수십 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청계천 공구거리를 축소해왔다. 을지로와 청계천 일대는 매년 재개발 붐으로 몸살을 앓았다. 서울시는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연결되어 자생해온 공구 생태계를 갈아엎길 반복했는데,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이라는 이름의 산발적인 재개발이 지금도 을지로 일대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 사이 문을 연 몇몇 공구 가게가 위태롭게 불을 밝힌다.
실제로 을지로 공구거리를 지나다 보면 "본 건물(호실)은 도시정비형제개발사업에 따른 철거를 위하여 폐쇄조치하였습니다"는 내용의 경고문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몇십 년간 성황을 이뤘던 공구 거리는 철거 예정인 곳이 부지기수고, 그나마 버텨오던 몇몇 공구상들이 폐업정리를 하면서 "을지로에선 탱크도 만들 만큼 기술력이 대단했다"고 자부했던 시절이 저물어 간다고 평한다. 서울시장을 비롯한 정책 집행자는 보존과 재생 사업으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가치는 손익 계산 항목에 포함하지 않은 듯하다.
그 틈바구니에서, 스러져가는 1세대 공구상의 명백을 잇고자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도하는 젊은 공구상이 태동하고 있다. 감각을 다져 "산업용품, 공구를 해석하고 탄탄한 실력으로 이 생태계를 새롭게 꾸미는" 사람들이 가게 셔터를 올릴 수 있도록 공구에 소소한 관심을 가져 보면 어떨까. 패셔너블한 보안경 혹은 층간 소음을 줄이는 드라이버를 '탐미'하는 것으로 '공구로운 생활'을 시작해도 좋겠다. 우리가 공구 가게에 눈길을 돌릴수록 조이고, 땜질하고, 연결하는 기술자와 공구상, 그리고 우리 집 살림의 오늘은 촘촘하게 풍요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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