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서 북한 노동자 만난 사연... "철도 타고 대륙으로"

차원 2023. 4. 13. 09:5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박흥수 철도기관사 "유라시아 횡단열차에서 북한 동포들과 물건 교환하며 친해져"

[차원 기자]

 강의하는 박흥수 현직 철도 기관사
ⓒ 차원
사단법인 희망래일(이사장 이철)이 주최하는 대륙학교(교장 정세현) 13기, 지난 11일 다섯 번째 강사로 박흥수 현직 철도기관사가 서울 충무로역 인근의 '공간 하제'를 찾았다(관련 기사: 김광운 "우리는 북한 얼마나 제대로 아나... 상대 바로 알아야" https://omn.kr/23dye). 
    
박 기관사는 이날 2시간여에 걸쳐 '한반도에서 출발하는 평화의 꿈 – 열차 타고 유라시아를 달리다'를 주제로 강연하며 한국철도의 역사,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직접 가본 유라시아, 그리고 열차에서 우연히 만난 북한사람들과의 교류, 남북 철도교류의 긍정적 효과 등을 이야기했다.

먼저 그는 "한국철도에는 아픈 역사가 있다"며 1876년 조선 수신사 대표로 일본 요코하마역에 도착한 김기수의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김기수는 "차가 이미 역에 있다고 들었는데, 우리가 탈 차는 어디에 있느냐"고 일본 안내원에게 물었다고 한다. 자신이 서 있는 이 큰 장소가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이후 일제는 철도를 침략과 수탈의 플랫폼으로 활용했다. 경인선은 러일전쟁의 보급선이자 경기 일원의 수탈선이, 경의선은 대륙 침략의 발판이, 호남·군산선은 토지와 미곡의 수탈선이 됐다. 조선에서의 이권 확장을 위해 세워진 경부철도주식회사는 대규모 모금으로 일본 최초의 '국민기업'이 되기도 했다. 경의선을 폭파했던 독립투사들은 일제의 본보기가 되어 공개처형을 당했다. 또 많은 조선인이 철도 건설 현장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수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쟁으로 철도의 상당 부분이 파괴당했고, 이후에도 정부는 철도보다 도로 건설에 역량을 집중했다. 박 기관사는 "식민지, 전쟁, 가난 속 방치됐던 철도가 지금의 수준이 된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라면서 "그런데도 '철도가 비효율적이다, 빨리 민영화하자'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매우 속상하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그는 지난 2019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여행한 이야기를 꺼냈다. 블라디보스토크역에 갔을 때는 푸틴과 정상회담을 하러 그곳에 온 김정일 위원장도 직접 보았다고 한다.

특히 이 역은 한국 역사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과거 독립운동 베이스캠프로서 100년 전 한인들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최재형, 이동휘, 홍범도, 김알렉산드라 등 독립투사들이 이곳을 거쳐간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중 홍범도는 레닌에게 권총을 선물 받기도 했다. 또 이곳에는 '서울 거리'라는 뜻의 '서울 스카야'도 있다. 한인들이 그리운 조국 도시의 이름을 붙여놓은 것이다.

북한 노동자들과 도시락 나눠먹기도... "서울역에서 하얼빈, 파리 등 보고 싶어"
  
 유럽-아시아 철도 루트 중 유라시아 철도로부터 고립된 대한민국의 모습(오른쪽 상단에 위치)
ⓒ 국제철도연맹(uic)
 
박 기관사는 열차에서 북한 동포들을 직접 만났다고 했다. 처음에는 서로 어색했지만, 북한 동포의 "우리 도시락을 같이 나눠 먹겠느냐"는 제안을 그가 받으면서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보기엔 도시락이 굉장히 호화로워 '당 고위 간부가 아닐지'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그들은 외화벌이를 떠나는 건설노동자들이었다. 3년간 타지에서 고생해야 하는 그들에게 가족들이 형편을 다 해 도시락을 싸 준 것이었다. 이후 박 기관사의 일행이 가져온 간식도 함께 나눠 먹으며 이들은 더 가까워졌다.

정차 시간을 이용해 서로의 담배를 바꿔 피우던 중 이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고 한다. 북한 담배가 남한에 비해 니코틴 함유량이 많은 탓에, 박 기관사의 일행은 담배가 '너무 세서', 북한 동포들은 '너무 약해서'이다. 그러나 심심한 맛에 중독됐던지 북한 동포는 담배 맞교환을 제안했고, 박 기관사는 흔쾌히 응했다는 이야기다. 

한편 이날 북한 동포가 직접 보여준 그의 낡은 '로어(러시아)회화' 책에는, '외국어학습에서는 회화가 기본입니다'라는 김정일 위원장의 머리말이 쓰여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교류의 장이 열리고 난 후 그들은 매우 친해졌다. 서로 장난도 치고, 함께 모바일 게임을 즐기기도 했다. 그러다 북한 동포들의 목적지인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아쉬움 속에 헤어졌다는 이야기다. 박 기관사는 "서로 말이 통한다는 것,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힘이) 정말 크다는 점을 직접 느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또 "2000년 8월 12일 김정일 위원장이, 당시 방북한 언론사 사장단과의 만남에서 '군부의 반대를 물리치고 철도 연결사업을 위해 비무장지대 중무장 군 병력을 후방으로 이동시켰다'고 했었다"며 "(제 생각에) 철도만한 평화 도구는 없다고 본다. 만약 전쟁으로 북한의 군대를 그만큼 (후방으로) 물리려 했다면 상대의 손실은 얼마나 컸겠느냐"고 말했다.

이어 "서울역에서 단둥, 하얼빈, 모스코바, 베를린, 파리, 블라디보스토크 등 도착지를 보고 싶다"며 "유라시아 철도 노선 연결은 정말 중요한 과제다. 우리의 열차가 대륙을 향해 달리는 장면을 상상하면 가슴이 뛴다. 산업·물류·환경·관광 등 모든 면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철도가 과거에는 전쟁과 침탈의 도구였다면 이제는 평화와 화합의 상징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함께 한반도에서 열차를 타고 유라시아로 달리는 꿈을 꾸자"고 이야기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