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24년만의 예타 완화…총선 노린 여야 합작
도로·철도 등 국가재정 수백억원이 투입되는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문턱이 크게 낮아진다. 반면에 나랏빚을 적정 수준에서 관리하기 위한 ‘재정준칙’ 도입은 미뤄졌다. 22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1년 앞두고 각 지역에서 표심을 얻기 위한 선심성 사업이 난립해 국가재정 건전성이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기재위) 소위원회는 12일 예타 기준을 대폭 완화하는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여야 합의로 의결했다. 개정안에는 사회간접자본(SOC)과 연구개발(R&D) 사업의 예타 대상 기준을 총 사업비 500억원(국비 300억원) 이상에서 1000억원(국비 500억원) 이상으로 조정하는 내용이 담겼다. 오는 17일 기재위 전체회의를 거쳐 이달 임시국회 내 본회의에 상정될 전망이다. 이대로 통과되면 2024년부터 1000억원 미만 도로·항만·공항·철도 사업은 추진 단계에서 기획재정부 예타 심사를 받지 않게 된다.
예타(국가재정법 제38조)는 신규 대형 공공투자 사업을 재정 당국이 사전에 자세히 검토하는 제도다. 우선순위와 적정 투자 시기, 재원 조달 방안 등을 꼼꼼히 따져 경제성과 효율성, 시급성이 떨어지는 선심성 사업을 미리 차단하는 일종의 견제 장치다. 그 기준이 완화되는 것은 1999년 제도 도입 이후 24년 만에 처음이다. 여야는 예타 기준 완화는 오래 검토해 온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기재위 야당 간사인 신동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12월에 여야가 잠정 의결했던 내용”이라며 “별 이의 없이 정부도 동의해 통과됐다”고 말했다. 여당 간사인 류성걸 국민의힘 의원도 ‘포퓰리즘’ 지적에 대해 “전혀 그것과 관계없다. 이미 (합의)됐던 것을 (처리)하자는 차원”이었다고 말했다.
여야가 잠정 합의했다는 지난해 12월 5일 소위원회 회의에선 지난 20여 년간 물가 상승이 법 개정의 핵심 논거로 제시됐다. 송언석 국민의힘 의원은 “예타 기준 조정과 관련해서는 굉장히 오래된 논의이고 만시지탄”이라고 말했고, 홍성국 민주당 의원도 “1999년 이후 오랜 시간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면제 기준이) 말이 안 된다”고 거들었다. 제도 설계 당시 예타 대상이 아니었을 소규모 SOC 사업도 물가 상승으로 예타 대상이 됐기 때문에 변화한 상황에 맞춰 예타 문턱을 낮추라는 논리였다.
문제는 현재도 다수의 SOC 사업이 문재인 정부 국무회의 의결로 예타 면제를 받아 시작된 상태에서, 또다시 규정 완화가 이어지게 된다는 점이다.
사사건건 대립하던 여야, 포퓰리즘 법안엔 손 잡았다
기재부에 따르면 2018년 12조8797억원 이었던 예타 면제 사업 규모는 2019년 35조9750억원, 2020년 30조215억원으로 훌쩍 커졌다. 이에 “문재인 정부 예타 면제가 이명박·박근혜 정부 예타 면제를 모두 합친 금액보다도 많다”는 얘기도 나왔다.
또 비수도권 사업에 대한 예타 방식을 이미 바꿨음에도 예타 면제 기준 자체를 완화한 점 역시 문제로 지적된다. 2019년 4월 문재인 정부는 비수도권 사업은 지역균형발전 가중치를 확대하고 경제성 평가 가중치를 내리는 개편 방안을 발표했다. 2021년 남해-여수 해저터널 사업(6974억원), 지난해 문경-상주-김천 철도 연결 사업(1조4000억원) 등이 낮아진 기준 덕에 예타를 통과했다.
여야가 24년 만에 예타 기준에 손을 댄 이면엔 내년 총선을 앞두고 각 지역에서 선심성 SOC로 유권자 표를 끌어오겠다는 심리가 깔려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사업비가 530억원으로 추산되는 충남 서산공항의 경우 예타 통과가 어렵다는 말이 나오자 김태흠 충남지사가 지난 5일 “사업비를 조정해서라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는데, 이번 법안이 통과되면 예타 없이 곧바로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된다.
예타 부담을 덜게 되면서 연말 예산 국회에서 각 지역구 의원의 숙원사업이 ‘짬짬이 예산’ 식으로 증액될 가능성도 커졌다. 앞서 여야는 지난 대선을 앞두고 10조원 이상 사업비가 들 것으로 추정되는 가덕도 신공항 사업에 대해 예타 면제 조항을 담은 특별법을 의결했고, 대구·경북(TK) 신공항 특별법도 추진되고 있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공항이든, 고속도로든 여야가 합심하면 안 될 게 없는데 그걸 이제까지 정부가 예타로 조절해 왔다”며 “그 방파제가 이제는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여야가 예타 완화와 연계해 처리하기로 했던 재정준칙 법제화를 뒤로 미루면서 포퓰리즘 비판은 더 거세다. 여야는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연간 재정적자 폭을 제한하는 재정준칙 도입을 놓고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예타 완화법만 먼저 처리하기로 했다. 류성걸 의원은 “재정준칙은 여야 간사 간 협의를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으나, 기재위 안팎에선 “합의 처리가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지난해 말 기준 국가채무는 1067조7000억원으로 집계됐다. 최근 3년간 매년 약 100조원씩 늘어난 국가채무는 올해에도 전년 대비 60조원 넘게 증가할 전망이다. 나랏빚은 빠르게 느는데 곳간을 채울 세수는 예상을 밑돌고 있다. 기재부에 따르면 1~2월 국세 수입 진도율(13.5%)이 최근 5년 평균 진도율(16.9%)보다 3.4%포인트 낮다. 당초 올해 세수를 400조5000억원으로 전망했던 정부는 최근 차질이 빚어지자 ▶유류세 인하 조치 단계적 축소·폐기 ▶종합부동산세 공정가액비율 60%→80% 환원 등 일부 감세 정책 폐기를 검토 중이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예타 면제 기준 완화와 관련해 “당장은 돈을 펑펑 쓰니까 인기가 있을 수 있지만, 근시안적인 정책”이라며 “세입과 세출을 독립적으로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국가재정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위문희·김정재 기자 moonbrigh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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