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은행 파산이 불러일으킨 나비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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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선 기자]
2월 초에 업무용 메일이 왔다. 발신자는 내가 모르는 이름이었는데 4월에 도쿄에서 모두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코로나 시기에 이루어진 조직 개편의 어딘가 저 위쪽에 있는 높으신 분이 쓴 것 같았다.
우리 회사는 조직 정리를 자주 한다. 개혁이 항상 이루어지고 있는 느낌이랄까. 예전에는 국가별로 관리를 했다면 이제는 기능별로 관리를 하는 체계다. 한국, 대만, 홍콩 이런 식으로 구별하는 게 아니라, 아시아 세일즈, 아시아 마케팅, 아시아 물류 이런 식으로 같은 기능을 한 팀으로 묶은 것이다.
그러다보니 매일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같이 일하는 팀이지만 얼굴은 본 적 없는 동료들이 많다. 이제 코로나로 인해 국경을 넘기가 힘들던 기간도 지났고 조직 개편을 한 지도 꽤 되었으니 다 같이 만나서 새로운 한 해를 잘 시작해보자는 뜻으로 대규모 워크숍을 개최한다는 것이었다.
▲ 시나가와 역 카페에서 본 출근길 인파 |
ⓒ 최혜선 |
잘못 온 메일이겠지? 팀이 다 모이면 100명이 넘을텐데? 마지막으로 도쿄 출장을 갔던 게 언제였더라? 전생의 일인양 아득하다. 곧 부장님의 메일이 왔다. 4월에 부서 전체가 출장을 가는 게 맞다는 확인을 받고 곧 항공권, 숙박 등의 예약이 시작되었다.
해외출장은 힘들다. 낮에는 이왕 간 김에 가능한 한 많은 관계자들을 만나 회의를 해야하고, 저녁에는 식사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숙소에 들어오면 꼭 처리해야 할 메일이 와 있는지 확인하고 급하게 처리를 해놓고서야 잠을 잘 수 있으니 말이다. 다녀오면 보고서와 영수증 처리도 출장을 힘들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다.
그렇지만 오랜만의 해외출장이 좋은 면도 있다. 일단은 하루의 할 일에서 엄마의 업무가 사라진다. 해외출장을 가면 해외라는 것도 설레는 부분이지만 나만 챙기면 된다는 홀가분함도 무시할 수 없는 설렘 포인트다.
코로나 이후로 우리 회사는 재택 근무를 하고 있다. 출퇴근길 지하철 혼잡을 겪지 않아도 되고 출퇴근에 약 두 시간을 길에서 쓰지 않아도 되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아침에 집을 나갔다가 오후에 차례로 들어오는 식구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다보면 일이 바쁜 날엔 '나 여기 없다고 생각 좀 해줄래?' 싶은 날도 있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세부 정보가 채워졌다. 일주일간의 대대적인 워크숍이 예정되어 있었다. 출국은 일요일, 돌아오는 비행기는 그 다음 주 일요일. 8일간의 일정이었다. 이런 이벤트가 생기면 옷 만드는 사람이 할 일은 하나다. 이벤트에 입을 옷 만들어 입기.
4월 중순이면 도쿄에 벚꽃은 이미 지고 없겠지? 기온도 우리나라보다 따뜻하겠지? 그럼 무슨 옷을 만들어서 입어볼까. 마치 도쿄 패션쇼에 출품작을 내는 패션디자이너가 되기라도 한 양, 2023 도쿄 컬렉션을 준비했다.
셔츠 하나, 바지 하나, 홑겹 코트 하나. 2019년 출장 시에 숙소 인근 시나가와역 카페에서 출근길 직장인들의 인파를 본 적이 있다. 놀라울 정도로 검은 양복 일색이었다. 도쿄 컬렉션이니 나도 올블랙으로 정했다. 보통 봄에 입을 옷을 마련할 때는 좀 더 밝은 색을 고르던 것을 생각하면 획기적인 선택이었다.
▲ 나만의 도쿄컬렉션 |
ⓒ 최혜선 |
출장이 전격 취소되었다. 북미 테크산업의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 지금은 대규모 예산이 쓰이는 행사를 집행할 때가 아니라는 이유였다. 황당했다. '와, 이럴 수가 있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실리콘밸리 은행의 파산이 3월 10일이었다. 2월에 대규모 모임을 알렸을 때는 이미 훨씬 전에 내부에서 예산 문제 등에 대한 검토를 했을테니 3월에 이런 대규모 경색이 일어날지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회사의 높으신 분들도 이런 경제위기를 미리 예측할 수 있었을 리는 없고 갑작스러운 비는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일 테니까.
아무 낌새도 없이 하루 아침에 메일 한 통으로 시작되었던 출장은, 봄날의 꽃봉오리가 부풀어오르듯 항공권, 숙박 예약, 도쿄에 간 김에 가지려 했던 여러 관계자들과의 미팅 준비, 토요일이던 귀국일을 하루 연장해서 도쿄 미술관 투어를 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으로 피어올랐다. 그러다 마찬가지로 아무 낌새도 없이 하루 아침에 메일 한 통으로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나도 도쿄 한 번 가보고 싶다던 아들은 내 출장이 무산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오히려 좋아'라며 반색했다. 남편도 '무슨 그런 일이 다 있어?'라며 공감해 주었지만 속으로는 회사 일이니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했던 아내의 부재기간이 사라져서 좋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 도쿄 컬렉션이 될 뻔 했던 올블랙 착장. 창덕궁에 가려고 오전 9시에 줄을 섰는데 9시 반에 겨우 구한 게 오후 1시 표였다. 남는 시간에 경복궁 꽃구경도 하면서. |
ⓒ 최혜선 |
그렇게 덩그러니, 올블랙 옷 한 벌이 남았다. 그 옷을 꺼내 입고 창덕궁을 찾았다. 매년 봄 창덕궁에 홍매화가 필 무렵 후원에서 꽃구경을 하는 것이 봄을 맞는 나만의 의식이다.
창덕궁 후원은 인터넷으로 6일 전에 예약을 하거나 당일 오전 9시부터 줄을 서서 현장 판매되는 티켓을 사야 들어갈 수 있다. 올해는 벚꽃이 빨리 펴서 예약하려 한 날짜에는 이미 꽃이 지고 없을 것 같아 주말 현장 판매분을 사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섰다.
▲ 창덕궁 봄꽃 |
ⓒ 최혜선 |
어차피 만들어 입으려던 봄옷에 '도쿄 컬렉션'이라는 이름을 붙여 평소라면 이 계절에 선택하지 않을 컬러의 옷을 만드니 바느질이 더 재미있었다. 경기 침체로 비록 도쿄 컬렉션이 되지는 못했지만 대신 창덕궁 봄꽃 컬렉션이면 어떠하리.
올블랙 의상은 화려한 꽃들 사이에서 확실하게 꽃을 돋보이게 해주는 상춘 컬렉션으로는 제격이라고 합리화 해본다. 이 옷을 입을 때마다 23년의 실리콘밸리 은행 파산이 불러일으킨 나비효과가 떠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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