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레이트]사라진 게임 저작권…소련도 함께 무너졌다

이종길 2023. 4. 12.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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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S. 베어드 감독 영화 '테트리스'
개발자 배제된 테트리스 사업 권리 경쟁
실존인물 통해 소련 국가자본주의 붕괴 부각
서방 자본주의 불공정도 간과하지 않아

테트리스는 간단한 게임이다. 일곱 모양으로 붙어있는 블록들을 좌우로 이동하거나 회전해서 쌓는다. 블록은 가로 한 줄을 채우면 사라져 점수가 된다. 이렇게 계속 쌓이는 블록들을 제거해서 화면 맨 위에 닿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얼핏 보기에는 쉽지만 레벨이 오를수록 내려오는 속도가 빨라져 어려워진다.

개발자 알렉세이 파지노프는 수족관에서 춤추듯 내려오는 넙치를 보고 퍼즐을 떠올렸다. 다른 넙치들과 겹치지 않게 헤엄쳐 바닥과 일체가 되는 움직임에 착안했다. 평소 즐기던 펜토미노(정사각형 다섯 개를 이어 붙인 도형으로 모양을 만드는 퍼즐)를 응용해 컴퓨터게임으로 만들었다.

심리학에는 일곱 숫자, 일곱 모양, 일곱 개념과 같이 인간이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숫자가 일곱이라는 이론이 있다. 예컨대 전화번호 일곱 숫자는 쉽게 외우지만, 그 이상의 숫자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파지노프도 일곱 모양의 블록이 바로 인식돼 직감적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고 봤다. 기대대로 테트리스는 1887년 플로피 디스크로 복사돼 북미에 급속히 번졌다. 서른 종의 게임이 7억 장 넘게 팔렸고, 휴대폰으로도 10억 회 이상 다운로드됐다. 영화 '테트리스'에서 주인공 헹크 로저스(태런 에저턴)는 마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저는 테트리스를 5분밖에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직도 꿈에서 블록들이 떨어져요. 그냥 중독적인 게 아니에요. 사용자 안에서 흡수돼요. 시적이에요. 예술과 수학이 마법처럼 공존해요. 이건… 완벽한 게임이에요."

로저스는 일본에서 테트리스를 컴퓨터, 비디오게임으로 배급하기 위해 스펙트럼 홀로바이트(미러소프트 계열사)로부터 권리를 사들인 실존 인물이다. 미러소프트가 이미 미국과 일본에 대한 비디오게임 권리를 아타리 게임즈에 팔아버려 컴퓨터 권리만 확보했다. 그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아타리 게임즈를 접촉해 가정용 비디오게임 권리를 획득하고 PC용과 패미콤용 버전을 연이어 출시했다.

그 무렵 닌텐도는 휴대용 게임기 게임보이를 선보이면서 테트리스를 전면에 내걸고 싶어 했다. 미러소프트에는 해당 권리가 없었다. 미노루 아라카와 사장은 로저스를 만나 휴대용 게임기 권리를 가져오면 서브라이선스(sublicense)를 보장하겠다고 제안했다. 로저스는 모스크바로 건너가 소련 국영 수출입 기업인 엘로그와 계약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아타리 게임즈는 물론 미러소프트에 가정용 비디오게임 승인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아무런 권리도 없는 회사와 계약하고 상품까지 출시한 셈이었다.

'테트리스'는 새롭게 펼쳐진 권리 경쟁에서 로저스가 고군분투한 이야기를 다룬다. 따지고 보면 테트리스가 소련에서 개발돼 벌어진 촌극이다. 파지노프는 테트리스 개발자라는 명예를 얻었을 뿐 게임의 라이선스 비즈니스로 인한 로열티 수입을 얻지 못했다. 공산국가인 소련에 사유재산을 전제로 한 저작권법이 있을 리 만무했다. 더구나 그는 테트리스를 개발할 당시 소련 과학 아카데미의 컴퓨터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직무 저작물(직업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만들어낸 창작물)로 볼 여지가 충분했다.

미노루 사장은 엘로그 관료인 니콜라이 벨리코프와 테트리스의 비디오게임 버전에 관한 권리를 부여받는 계약을 맺으면서 파지노프의 권리가 무엇인지 물은 적이 있다. 벨리코프는 "파지노프는 소련 과학 아카데미를 위해 일하고 있고, 근무 시간에 테트리스를 개발했다"며 "저작권은 소련 과학 아카데미가 갖고, 엘로그는 그 거래 기구로서 테트리스를 라이선스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답했다. 이를 두고 서구 매체들은 소련이 파지노프로부터 모든 권리를 박탈했다고 비판했다. 벨리코프는 다음과 같이 반문했다. "만약 테트리스가 보잉사에서 일하는 직원에 의해 보잉사에서 일하는 시간에 개발돼 보잉사가 이를 라이선스했다면, 그 직원은 파지노프보다 더 많이 받았을 것인가?"

사실 파지노프는 소련 과학 아카데미에 테트리스에 관한 권리를 양도했다. 영구적이었는지 10년 기한을 뒀는지는 나중에 법적 문제로 대두됐다. 파지노프가 엘로그에 권리를 양도한 기한이 만료된 1995년 말과 엘로그가 1989년 닌텐도사에 5년간 독점적 라이선스를 준 계약의 종료 시점이 우연히 맞물리면서 분쟁으로 이어졌다. 벨리코프와 로저스, 파지노프는 소송보다 합의에 따른 해결을 시도했다. 각자 주장한 만큼 지분을 챙기고 지금의 테트리스컴퍼니(TTC)를 설립했다.

'테트리스'에 이런 사실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파지노프가 권리를 양도한 사실을 숨긴다. 헝가리 출신 사업가 로버트 스타인이 아무런 승낙도 받지 않고 테트리스 권리를 미러소프트와 스펙트럼 홀로바이트에 판매한 점에 착안해 허구적 설정까지 제시한다. 공산당중앙위원회 간부인 발렌틴 트리포노프가 파지노프에게 저작권을 몰래 팔았는지 캐묻는 신이 그것이다. "당신 게임의 저작권을 서부에 팔았다고 들었습니다. 이익은 남았나요? 이곳에서 이렇게 인기 있는 게임이 해외에서 어떻게 돈이 안 됐죠? 누군가 가로채는 겁니다."

당시 소련 붕괴 조짐과 결부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소련의 국가자본주의 방식은 1970년대 말부터 비효율적으로 흘렀다. 새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위기를 타개하려고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사회주의 때문은 아니다. 노동자 혁명의 성과들을 파괴하고 권위주의적 일당 통치를 장기화한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말로에 가깝다. '테트리스' 속 고르바초프의 항변대로다.

"우리나라는 망가졌어요. 국민은 자유를 원해요. 투표의 자유, 운명을 선택할 자유. 공산주의는 절대 자유를 막는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의 욕심이 방해됐죠. 세상은 변하고 있고, 소련은 뒤처지지 않을 겁니다."

청자인 로버트 맥스웰 미러소프트 회장은 테트리스 권리 계약이 어긋나자 '공산주의의 종말'을 운운한다. 실제로 소련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서방 자본주의의 승리는 아니다. 세계 자본주의 경제는 1970년대 초부터 위기를 겪었다. 소련이 무너질 무렵에도 그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소련 붕괴를 자축한 지 얼마 안 돼 경제 불황과 대중 저항에도 부딪혔다. 1995년 프랑스 공공부문 파업, 1999년 반자본주의 운동 등이다. 테트리스처럼 단순한 게임에서조차 불공정하게 거래한 결과가 아닐까.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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