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솔향 뿜던 소나무 껍질이 ‘뚝’…쑥대밭된 경포 송림[르포]

최종권, 박진호 2023. 4. 12.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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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발생한 강릉 산불로 난곡동 등산로에 있던 소나무 숲이 검게 탔다. 최종권 기자


경포 자랑 소나무 숲 쑥대밭


12일 오전 강원 강릉시 난곡동 시루봉. 10~15m 높이 소나무가 우거진 이곳은 경포호를 찾는 관광객과 인근 주민이 찾는 명소다. 수령 80년 이상 된 소나무를 배경으로 경포호를 바라볼 수 있다. 걸어서 5분 거리에 강원도지정 유형문화재인 ‘방해정(放海亭)’이 자리 잡고 있다.

이날 찾은 시루봉 등산로 소나무 숲은 폭탄을 맞은 듯 폐허가 돼 있었다. 전날 산불이 초속 30m가 넘는 강풍을 타고 해안가와 가까운 시루봉까지 금세 번지면서 숲이 훼손됐다. 잡목은 다 타서 재가 쌓여있었다. 소나무 대부분이 밑동에서 위쪽으로 절반 이상 검게 그을려 있었다.

소나무 껍질을 만지자 ‘뚝’하고 부러지며 재가 날렸다. 발밑에서는 온기가 느껴지고, 탄 냄새가 진동했다. 산 주인이라고 밝힌 한 주민은 “산 아래 주민과 관광객이 많이 찾았던 소나무 길이 이번 산불로 상당 부분 훼손됐다”며 “숲이 우거져서 참 좋았던 곳인데 하루아침에 경관이 망가졌다”고 안타까워했다.
경포대 앞에 있는 소나무가 지난 11일 발생한 산불로 검게 그을렸다. 최종권 기자


강풍에 쓰러지고, 부러진 나무도


11일 강릉시 난곡동에서 시작한 대형 산불은 주택과 펜션뿐만 아니라 경포 주변 소나무 숲을 초토화했다. 이번 산불로 축구장 면적(0.714㏊) 530배에 이르는 산림 379㏊가 소실됐는데 대부분 소나무 숲이다.

2000년 동해안 대형산불에 앞서 1998년과 2002년 등 경포지역 산불에도 큰 피해 없이 울창함을 자랑해왔던 송림(松林)이 이번 산불로 시커멓게 타 버렸다. 산림 피해 조사에 나선 강릉시 관계자는 “아직 정확한 집계가 되지 않았지만, 경포호 주변 난곡동, 펜션 촌이 있는 저동 인근 소나무 숲 피해가 큰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강릉을 대표하는 ‘경포 송림’은 대관령 금강소나무 숲과 함께 강릉의 또 다른 관광자원이었다. 소나무 사이사이에 대나무를 심어 운치를 더했다. 피해가 발생한 지역은 대부분 울창한 아름드리 소나무가 빽빽하게 숲을 이루던 곳이다. 선교장(국가민속문화재)과 경포대(강원도유형문화재)·방해정 등 경포호 주변 정자를 낮은 야산이 둘러싼 형태다.
강릉시 대표 관광 명소인 경포대는 지난 11일 발생한 산불에도 천신만고 끝에 모습을 지켰다. 최종권 기자


경포호, 저동 인근 야산 소나무 피해 커


경포대 앞 소나무도 산불을 비껴가지 못했다. 강릉시 직원 등 노력으로 몇 그루를 제외하고 대부분 불에 탔다. 수령 100년이 넘은 아름드리 소나무 10여 그루도 불에 탄 모습이 보였다. 이곳에서 만난 임동한(57)씨는 “소나무 숲이 너무 좋아서 매주 경포대를 한 번씩 찾아 산책했다”며 “소나무를 다 베어버리고 나면 한동안 민둥산이 될 텐데 주민 휴식처가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저동펜션촌 일대 소나무 숲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골짜기에 길게 늘어선 펜션 뒤 야산이 불에 타면서 소나무 대부분이 훼손됐다. 일부 소나무는 강풍에 꺾이거나 쓰러져 있었다. 잔불 정리를 위해 물을 뿌리던 강릉소방서 관계자는 “오전에 잔불이 남아있다는 신고를 받고 불을 정리하러 왔다”며 “소나무 숲 바닥에 쌓인 솔방울이나 재가 불쏘시개가 될 우려가 있어서 갈퀴로 긁어내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고 했다.

저동 산기슭에는 은퇴 이후 전원주택에서 생활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 주민은 “소나무 향이 좋아서 산 가까이 집은 지은 사람이 많았는데 이번 산불로 숲이 사라져 동네가 폐허처럼 변했다”며 “죽은 나무를 베어내고, 조림 사업을 하더라도 원래 모습을 찾는데 긴 세월이 걸릴 것 같다”고 말했다.

강릉=최종권·박진호 기자 choi.jongk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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