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구속하지 않고 편하게..." 막노동 일꾼의 사랑법 [나의 막노동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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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7년간 종사한 기자 생활을 끝내고 지난해 9월부터 노가다를 시작했습니다. 말로만 듣고, 눈으로만 스쳐지나가던 막노동을 하며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인생의 희로애락을 몸소 체득하고 있습니다. 몇 차례에 걸쳐 직접 겪은 땀의 현장을 전합니다. <기자말>
[나재필 기자]
▲ 청주 창공에 공군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가 태극문양을 그리고 있다. |
ⓒ 나재필 |
공사 현장에도 사랑은 움튼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노동자들은 '노동에 사랑을 싣고' 서로를 의지하며 산다. 한쪽 어깨는 삶의 동력으로 사용하고, 한쪽 어깨는 누군가에게 아낌없이 내어주기도 한다. 그건 외로움을 이기는 방법일 수도 있고, 작은 위안일 수도 있다.
대기업 반도체공장 증설 현장은 돈을 좇아 모여든 사람들이지만 그중에서도 특이한 인연들이 많다. 부부가 한 일터에서 일하는가 하면 부녀지간, 모자지간에 이어 가족 전체가 한곳에서 일하는 경우도 있다. 친구들이나 선후배, 지인들끼리 뭉친 부류가 가장 많다. 젊은 연인이 단기간 큰 벌이를 위해 손잡은 이도 있고, 이곳에서 눈이 맞아 동거하는 이도 적지 않다.
사연이 어떻든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하는 이들의 사연을 전한다.
# 30대 A씨 부부 '정겨운 타향살이'
함께 일하면 장단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서로 다른 일을 하면 상대방 일에 대해 이해도가 떨어지지만, 같은 일을 하니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대번에 안다. 수입도 두 배이고, 돈 씀씀이도 투명하다. 단, 비상금과 비자금을 만들 수 없다는 점은 살짝 단점이다.
"24시간 껌딱지로 살다 보니 마찰이 적지 않아요. 일의 특성상 남녀의 구분이 있고 영역이 있는데 그 경계를 넘을 때가 생기죠. 서로 챙겨주다가 역효과가 나기도 합니다. 부부간 애정이 깊으면 동료 눈치를 보게 됩니다.
보란 듯 잘해주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손이 안으로 굽는데 그걸 부정할 수도 없고. 짝짜꿍 맞추기가 쉽지 않아요. 일을 잘하면 별문제 없는데 한쪽이 잘못하면 쌍으로 욕을 먹는 경우도 있죠. 하지만 가장 큰 장점은 벌이가 합쳐질 때의 뿌듯함입니다. 기쁨 두 배입니다."
▲ 청주 무심천변에 벚꽃이 활짝 만개해있는 모습. 지난 주말 친구 부부와 빨간 테이블서 소주 한잔을 했다. |
ⓒ 나재필 |
한곳에 정착하지 않거나 지역을 옮겨 다니는 사람을 흔히들 뜨내기라고 한다. 이곳 현장은 일자리를 찾아 방방곡곡에서 모인 노동자들이다. 그런데 타지에서 온 사람들은 쉬는 날에 딱히 할 일이 없다. 그냥 잠을 자거나 게임, 술자리를 갖는다.
극소수지만 쉬는 날에도 일반 공사 현장서 아르바이트를 뛰는 사람도 있다. 하릴없이 빈둥거리느니 한 푼이라도 더 벌자는 쪽이다. 숙소는 업체서 구해주기도 하는데, 보통 두 사람이 한방을 쓴다. 아는 사람끼리의 동거야 이상할 거 없지만 보통 생면부지의 사람과 짝을 이룬다. 그러다 보니 불편한 점이 한둘 아니다.
어색함은 기본이고,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그렇다고 속내를 잘 드러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서로가 금세 헤어질 운명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속정을 줄 경우 상처 받을 확률이 높다. 대신 공사 현장에서 연인을 만나기도 한다.
"많이 외롭죠. 친구들끼리 숙소에서 지내면 무료함과 외로움이 덜하지만 낯선 타향에서 혼자 지내는 건 돈을 떠나서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다가 맘이 맞는 사람을 이성을 만났습니다. 서로 의지했고 금세 동거하기에 이르렀죠. 설득할 필요도 없었어요. 처지를 아니 자연스럽게 하나가 됐습니다. 말동무, 술 동무도 되고...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이 됩니다. 나중에 결혼할 뜻도 있습니다. 지금은 목표가 있고, 서로를 알아가고 있는 중이니 일에만 집중하고 있지요."
# 50대 남자의 나 홀로 연애법
그는 혼자 산다. 사비를 들여 제법 괜찮은 숙소를 마련했다. 혼기를 놓쳤지만 사랑도 두어 번 진하게 해봤기에 아쉬움은 없다. 다만 적적한 타지 생활이 싫어 자유연애를 하고 있다. 상대방도 뜻이 같다. 결혼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때때로 만나 애인처럼 논다.
"서로 구속하지 않고 편하게 만나니까 좋아요. 뻔뻔하게 깊어져만 가는 고독을 다시 한번 사유하죠. 뭔가를 바라지도 않고 바랄 것도 없어요. 진지하지 않은 만남을 약조했습니다. 그렇다고 불장난은 아닙니다. 서로의 뜻을 존중하죠. 술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함께 합니다. 때론 애인 같기도 하고, 때론 친구 같기도 해요. 어떤 이는 진짜 부부인 줄 알더라니까요."
나도 한때 숙소생활을 잠깐 했었다. 룸메이트는 이혼한 남자였는데 아예 살림살이를 숙소에 차렸다. 그가 들여놓은 세간살이와 옷들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졸지에 내가 더부살이하는 꼴이 됐다. 나는 빨랫감을 봉투에 담아뒀다가 주말에 집에 가서 세탁했다.
그와의 숙소 동거 생활은 무미건조했다. 출근해서 일하고 밤 11시 가까이 숙소에 들어오면 샤워만 끝내고 쓰러져 잤다. 함께 밥 먹는 경우도 없었고, 내가 가끔 소주를 사오면 벽을 보고 홀짝거렸다. 아무리 가볍고 짧은 만남이라 해도 '정'이 너무 없어 삭막했다. 어느 날엔가는 나에게 먹어보라는 얘기 한마디 없이 혼자 아침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아, 이건 아니잖나. 내가 투명인간인가. 어떻게 저리도 이기적이지. 최소한 먹어보라는 소리는 할 수 있잖아' 속으로 중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업체를 이동하면서 헤어졌다. 이곳 현장 노동자들은 되도록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애쓴다. 한마디로 쿨하다. 쉽게 정을 주지 않고, 이별에도 능하다. 별안간, 갑자기 이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남은 우연이지만 헤어짐은 필연이란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럴 땐 제멋대로 왔다가 제 맘대로 사라질 운명이 그려지곤 한다. 새들이 높은 곳에 둥지를 틀 듯 이들은 침해받지 않으려고 보통의 관계를 유지하며 스스로 격리의 삶을 산다.
▲ 조각배 한 척이 마치 물이 차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금강변에 외로이 정박해있다. |
ⓒ 나재필 |
지난 1월, 평소 가깝게 지내던 30대 초반 팀원이 갑자기 소주 한잔하자고 했다. 퇴근 후 동네 삼겹살집에 앉아 한 순배 돌 즈음 그가 입을 열었다.
"저,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내일 퇴사합니다. 형님께는 하루 전이라도 말씀드리는 게 도리일 것 같아서 뵙자고 한 겁니다. 요즘 공수(한 달 일수×일당)가 안 나와 좀 더 나은 곳으로 옮겨보려고요."
이별은 짧았다. 거의 통보 수준의 얘기를 듣고 내심 섭섭했다. 그래도 사전에 귀띔이라도 해준 게 어딘가. 카카오톡 단톡방에 '퇴사합니다'란 말만 남기면 그걸로 끝인데, 얼굴이라도 보며 안녕을 고해주니 감사하잖은가. 이곳에서 헤어짐은 아주 익숙하고 흔한 일이다. 그러니 건강하게, 무탈하게, 감정 없이 일하면 그걸로 족하다.
인생의 절반은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위해 보내고, 인생의 후반부에선 건강을 되찾기 위해 돈을 쓰면서 보낸다고 한다. 그만큼 일과 건강은 인연처럼 따라다닌다. 막일을 목표껏 하려면 챙겨줘도 안 먹던 홍삼액이라도 떠먹어야 한다. 우린 어제의 기억을 과거로 돌리고, 오늘의 기억을 추억으로 만들며 내일을 기약한다. 어떤 동물도 현재만 살지만 인간만이 과거, 현재, 미래를 오가며 산다.
"그래, 가보는 거다. 설마 쨍하고 해 뜰 날이 오지 않겠는가. 오늘의 태양을 보며 내일의 태양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혹시 내일이 오면, '내 일'이 사라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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