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노출영화가 아닌 '은교'의 진짜 메시지

양형석 2023. 4. 12.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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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배우 김고은의 데뷔작이자 출세작 <은교>

[양형석 기자]

특정 이미지에 묶여 있는 여성배우들은 자신의 연기 폭을 넓히기 위해, 또는 대중들이 가진 편견을 깨기 위해 노출연기에 도전하곤 한다. 1999년 <해피엔드>에 출연했던 전도연과 2004년 <얼굴 없는 미녀>에 출연했던 김혜수, 2008년 <미인도>를 선택했던 김규리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전도연과 김혜수, 김규리는 과감한 연기변신이 성공한 케이스이고 노출연기로 '벗는 배우'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기는 배우들도 적지 않다.

이 같은 부담 때문에 어느 정도 대중적인 인지도를 가진 배우들은 노출연기가 포함된 영화의 출연을 꺼리는 경우도 많은 편이다. 하지만 이야기 흐름에서 노출장면이 필요한 영화들은 나올 수밖에 없고 이에 최근 제작사에서는 기존배우 대신 신인배우를 발굴해 과감하게 기용하는 경우가 많다. 2014년 <인간중독>에 출연했던 임지연과 2016년 <아가씨>에 출연했던 김태리, 2018년 <버닝>에 출연한 전종서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임지연과 김태리는 모두 데뷔작 이후 <더 글로리>와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김은숙 작가가 집필한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인기배우로 급부상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임지연과 김태리가 데뷔하기 전, 영화에서 과감한 노출연기를 시도했던 이 배우 역시 지난 2016년 김은숙 작가의 <쓸쓸하고 찬란하神 도깨비>에 출연하며 대중들과 더욱 가까워졌다. 지난 2012년 정지우 감독의 <은교>를 통해 데뷔했던 김고은이 그 주인공이다.
 
 김고은은 <은교>로 10개 영화제의 신인상을 쓸어 담고 충무로가 가장 주목하는 배우로 성장했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데뷔작으로 신인왕 10개 휩쓴 괴물신인

어린 시절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중국에서 10년 동안 살았던 김고은은 귀국 후 계원예고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에 입학했다. 안은진과 박소담, 이상이, 김성철 등 당시 김고은과 함께 학교를 다니며 연기를 배웠던 한예종 동기들 중 상당수가 현재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김고은은 그렇게 쟁쟁한 동기들 사이에서도 연예계에서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냈다.

몇 편의 단편영화에 출연하며 경험을 쌓던 김고은은 2012년 정지우 감독의 <은교>에서 3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한은교 역에 발탁됐다. <은교>에서 발칙하면서도 청순한 매력을 뽐낸 김고은은 대종상과 청룡영화상을 포함해 무려 10개 영화제의 신인상을 휩쓸었다. 하지만 <은교>에서 과감한 노출연기를 불사했던 김고은은 이후 <몬스터>와 <차이나타운> <협녀, 칼의 기억> 등을 통해 강하고 사연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로 이미지가 굳어졌다.

김고은은 2016년 인기웹툰을 원작으로 한 <치즈인더트랩>에 출연해 미스캐스팅 논란을 딛고 좋은 연기를 보여줬고 그해 연말 드디어 그녀의 대표작 <도깨비>를 만났다. 김고은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은 <도깨비>에서 도깨비 신부 지은탁을 사랑스럽게 연기하며 시청자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김고은은 2018년 이준익 감독의 <변산>과 2019년 정지우 감독의 <유열의 음악앨범>에 출연하며 영화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김고은은 2020년 김은숙 작가의 <더 킹: 영원의 군주>에서 1인 2역에 도전했지만 <더 킹>은 '16부작 간접광고'라는 비판 속에 뒤로 갈수록 한 자리 수 시청률에 머물렀다. 하지만 김고은은 2021년과 2022년 웹툰 원작의 시즌제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에서 김유미 역을 맡아 섬세한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김고은은 <유미의 세포들>을 통해 제1회 청룡시리즈 어워즈에서 <소년심판>의 김혜수를 제치고 초대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22년 <헤어질 결심>의 정서경 작가가 집필한 <작은 아씨들>에서 세 자매의 맏언니 오인주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친 김고은은 연말 윤제균 감독의 <영웅>에서 가상캐릭터인 조선의 마지막 궁녀 설희를 연기했다. 영화와 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출연하는 작품마다 매력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 김고은은 최근 최민식과 함께 <검은 사제들> <사바하>를 연출했던 장재현 감독의 신작 <파묘> 촬영을 마쳤다.

노출 영화 아닌 슬픈 사랑이야기
 
 이적요는 은교를 너무 아끼는 나머지 마음껏 안아 보지도 못했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은교>는 '영원한 청년작가'로 불리는 소설가 박범신 작가의 '갈망 3부작' 중 3번째 이야기 <은교>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박범신 작가의 갈망 3부작은 <촐라체>와 <고산자> <은교>를 일컫는 말인데 N포털사이트에 연재됐던 <촐라체>는 연재 당시 누적방문 100만을 돌파했고 <은교>는 2012년 정지우 감독에 의해, <고산자>는 2016년 강우석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사실 2012년 4월 25일로 잡힌 <은교>의 개봉시기는 매우 좋지 않았다. 같은 날, 마블 스튜디오의 '슈퍼 히어로 올스타전' <어벤져스>가 개봉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벤져스>는 개봉과 동시에 전국 극장가를 휩쓸며 700만 관객을 동원했고 20일 넘게 국내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하지만 <은교>는 조용한 입소문 속에 꾸준히 2~3위권을 유지하면서 전국 134만 관객으로 손익분기점을 돌파했다.

사실 개봉 11년이 지난 현재까지 <은교>는 김고은이 신인시절에 출연한 노출영화로 기억하는 관객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은교>를 그저 여배우의 노출로 관객을 모으려는 수준 낮은 영화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은교>는 서로를 누구보다 아끼고 좋아했지만 차마 다가갈 수 없었던 두 남녀의 안타까운 사랑을 다룬 가슴 시린 멜로 영화다. 이적요(박해일 분) 또는 한은교(김고은 분)에 감정을 이입하면 <은교>를 더욱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다.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성인 여성이 교복을 입고 등장하는 음란물은 규제대상으로 지정하고 있다. 지난 2015년 헌법제판소에서도 이에 대해 합헌결정을 내린 바 있다. 헌재의 합헌 결정 이후 일각에서는 김고은이 교복을 입고 출연하는 <은교> 역시 처벌대상이 돼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아청법을 소관하는 여성 가족부에서는 <은교>를 음란물이 아닌 19세 이상 관람가의 상업영화로 규정했다.

<은교>를 연출한 정지우 감독은 1999년 전도연의 파격변신으로 화제를 모은 <해피엔드>를 통해 상업영화 감독으로 데뷔했고 2005년에는 독특한 감성의 멜로영화 <사랑니>를 연출했다. 2008년 김혜수, 박해일 주연의 <모던보이>가 전국 76만 관객에 그치며 주춤했던 정지우 감독은 2012년 <은교>를 만들었고 2019년엔 <유열의 음악앨범>으로 부일영화상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했다. 정지우 감독은 2022년 넷플릭스 드라마 <썸바디>를 연출하기도 했다.

30대 중반에 70대 노인 연기한 박해일
 
 공대 출신의 신인작가 서지우는 스승 이적요가 써준 소설을 출간해 단숨에 베스트셀러 작가에 등극한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은교>는 개봉 직후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은교 역의 김고은이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했지만 사실 영화에서 가장 파격적인 변신을 단행한 배우는 이적요 역의 박해일이었다. 30대 중반의 많지 않은 나이에 70대의 국민시인 이적요로 변신한 박해일은 자신의 집에 청소 아르바이트를 오게 된 이웃집 소녀 은교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노인의 몸으로 차마 은교에게 다가가지 못한 이적요는 자신의 욕망을 소설 <은교>를 쓰면서 풀어냈다.

사실 <은교>가 개봉하기 2년 전에도 영화 <이끼>에서 정재영이 노인으로 분장한 적이 있다. <이끼>는 천용덕의 현재와 과거를 번갈아 가며 보여주는 구성의 영화였지만 <은교>는 중간에 이적요가 꿈꾸는 장면을 제외하면 과거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에 굳이 30대 배우에게 노인분장을 시킬 필요가 있었냐는 비판도 있었지만 정지우 감독은 '젊음에 대한 미련'이라는 영화의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박해일의 캐스팅과 노인분장을 강행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홈> 시즌 2, 3와 2024년 개봉 예정인 영화 <범죄도시4> 등 여러 작품에 출연이 예정된 배우 김무열은 한창 뮤지컬배우로 활약하던 시절 <은교>에서 이적요의 제자 서지우를 연기했다. 대학에서 무기재료를 전공했음에도 시인 이적요의 제자가 된 서지우는 스승 이적요가 써준 소설 <심장>을 발표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고 이적요가 은교를 생각하며 쓴 단편소설 <은교>를 허락 없이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했다.

서지우는 스승의 소설을 무단으로 도용해 출간했을 뿐 아니라 이적요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은교의 육체를 취하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르며 이적요에게 '처단'을 당했다. 중간에 은교가 없었다면 서지우는 그저 '표절작가'로서 문학계에서 매장 당하는 선에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은교의 몸을 탐한 순간부터 서지우는 이적요에게 자신의 작품을 표절한 괘씸한 제자가 아닌 같은 하늘 아래서 살 수 없는 원수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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