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직지(直指)’와 프랑스공사 콜랭 드 플랑시

2023. 4. 12.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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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직지)이 50년 만에 대중에게 공개됐다. 프랑스 파리의 프랑스 국립도서관(BNF)이 11일(현지 시간)부터 7월 16일까지 여는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전시에서다.

프랑스 국립도서관(BnF)이 11일(현지시간)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전시회 개막을 하루 앞두고 공개한 직지 하권의 실물. [이미지출처=연합뉴스]

프랑스 파리에는 세계적인 박물관이 여러 곳 있다. 루브르박물관, 라디오박물관, 아랍박물관, 와인박물관, 유대박물관, 기메박물관, 아르메니아박물관 …. 이들 중 루브르 다음으로 내 호기심을 사로잡은 곳은 기메 박물관(Musee Guimet)이다.

기메박물관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거의 30년 전, 19세기 말 조선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다. 제국주의 열강의 삼각파도가 밀어닥치는 상황에서 조선은 물 새는 돛단배였다.

그 가련한 조선을 구해내려 백방으로 몸부림쳤던 선각자들, 그중에서 유심히 살펴봤던 건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들이다. 삼일천하로 끝난 뒤 그들은 필사적으로 각자도생의 길을 걷는다.

멸문지화(滅門之禍)도 모자라 부관참시까지 당해야 했던 홍영식, 미국에서 의사 과학자가 되어 자유로운 독립국을 꿈꾸며 계몽운동을 펼쳤던 서재필, 상하이에서 은신하다 자객의 칼에 죽고 양화진에 목이 내걸린 김옥균. 김옥균의 시신에 가한 고종의 야만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소름 끼친다.

프랑스 파리 기메박물관 전경. 사진=위키피디아

이와 관련해 특히 호기심을 자극한 인물은 홍종우(洪鍾宇 1850~1913)다. 고종의 지령을 받고 김옥균을 상하이까지 찾아가 살해한 홍종우는 프랑스 유학파였다. 파리에서 살아본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의아했다. 아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국주의 열강인 프랑스를 경험한 이가 어떻게 조선을 개화시켜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겠다는 뜻을 가졌던 김옥균을 그렇게 무참하게 시해할 수 있었을까. 선진 문명을 보고 느낀 지식인이 어떻게 수구파의 하수인으로 전락해 개화파를 암살했을까. 그가 프랑스 파리에서 보고 배웠던 것은 도대체 무엇이길래.

서구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그가 일본의 신문사에서 식자공으로 돈을 모아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것은 1890년. 1892년 바라 탐사단의 수집품이 기메박물관으로 이관되면서 그는 기메박물관의 연구보조자로 채용된다. 임시직원으로 그는 수집품을 분류하고 프랑스어와 한국어로 유물 카드를 만드는 일을 했다.

몇해 전 파리 16구의 한 광장을 지나다 우연히 기메박물관 앞을 지나게 되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기메박물관 정문을 응시했다. ‘저기를 들어가 봐야 하는데…’ 갈 길이 바빴지만, 쉬이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 스케줄이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하며 걸음을 돌려야 했다.

기메 박물관은 동양박물관이다. 프랑스 기업가이자 여행가인 에밀 기메가 1879년에 설립한 박물관이다. 기메 박물관은 한국·일본·중국 3국 박물관으로는 세계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다.

1900년의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사진=위키피디아

기메 박물관의 명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 있다. 외교관이자 수집가였던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 1853~1924)다. 평생 독신으로 산 그는 71년의 생애 중 외교관으로 30년을 근무했다. 파리의 동양어학교에서 중국어를 배운 그는 1877년 졸업과 함께 북경 주재 프랑스대사관의 수습통역사로 채용된다.

스물네 살에 중국을 밟은 그는 6년 뒤 정식 영사 자격을 취득했고, 북경 주재 프랑스대사관 2등 영사가 된다. 상하이 주재 프랑스 영사를 거쳐 1886년 조선에 도착했다. 그는 조선에 머물며 조불(朝佛)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의 세 번째 임지는 일본이었다. 도쿄에서 영사로 10년을 근무한 뒤인 1896년 조선 상주 프랑스 영사로 발령받는다. 그리고 1906년까지 10년간 근무하며 공사대리를 거쳐 프랑스 공사가 된다. 조선에 10년 근무하면서 타고난 근면함과 사교성을 바탕으로 프랑스 국익 증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공사 시절 그는 조선 정부와 협상해 경의선 부설권과 광산채굴권을 획득하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 공사관은 정동길, 현 창덕여중 자리에 있었다. 서울 정동길은 서구 열강의 대사관과 공사관이 집중된 외교가(街)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등이 정동길에 몰려 있었다. 조선은 프랑스를 법국(法國)이라고 표기했다. 프랑스 공사는 매년 가을이면 법국 공사관 정원에서 국화꽃 파티를 개최하곤 했다.

우리가 콜랭 드 플랑시와 관련해 눈여겨봐야 할 것은 수집가로서의 안목이다. 문헌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외교관 신분으로 세 권짜리 ‘조선 서지(朝鮮 書誌)’를 출간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한성에서 어떤 조선인으로부터 ‘직지(直指)’를 고가에 구입했다. ‘직지’의 역사적 가치를 알아본 최초의 외국인이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직지’를 전시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의 가치를 세계에 알린 인물이다.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는 조선이 참가한 최초의 만국박람회다. 고종은 프랑스 공사의 권유로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한다. 콜랭 드 플랑시는 만국박람회장에 한옥을 설치해 전통공예품과 문헌들을 선보였다. 그 문헌 중에 ‘직지’가 있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라는 설명과 함께 말이다. 그는 이어 ‘조선 서지’에도 직지의 의미를 정확하게 기록했다.

외교관으로 정년퇴직한 그는 1924년 프랑스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수집품들은 골동품 중개상 앙리 베베르에게 넘어갔다. 베베르는 수집품들을 분류해 문헌은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미술품들은 기메박물관에 각각 기증했다.

1972년 5월28일자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로 실린 '직지' 기사. 사진=조선일보 캡처

1972년 조선일보의 특종

최고(最古) 금속활자본 ‘직지’의 존재가 세계에 알려진 것은 1972년 5월 28일 자 조선일보다. ‘고려 금속활자본 직지심경 세계 최초 공인’. 신용석 조선일보 파리특파원의 세계적 특종이었다.

1969년에 파리에 부임한 신용석 특파원은 루브르박물관 내에 있던 프랑스국립도서관을 자주 드나들며 동양서적 담당 사서 ‘마리 로즈 세규이’를 알게 되었다. 그때 세규이 사서 방에는 아르바이트로 사서를 돕던 박병선(1928~2011)씨가 있었다.

1972년 5월 어느 날 신 특파원은 세규이로부터 ‘책의 역사’ 특별전에 내놓을 한국 문헌을 찾던 중 서고에 있던 ‘직지’를 발견해 전시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프랑스어가 유창한 신 특파원은 취재에 들어갔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의 존재를 알리는 특종의 주인공이 된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보다 75년 앞섰다는 제목과 함께. 프랑스국립도서관은 1973년 ‘동양의 재보전(財寶展)’에서도 전시회에 ‘직지’를 내놓았다. 두 번의 전시회를 계기로 세계 모든 문헌, 교과서, 백과사전에 ‘직지가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이 기록된다. ‘직지’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프랑스 국립도서관(BnF) 전경. 사진=조성관 작가

‘직지’는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의 줄임말이다. 고려 우왕 3년(1377년)에 청주 흥덕사 주자소(鑄字所)에서 인쇄된 서책이다. 상·하권 2권이 인쇄되었으나 상권은 망실되고 하권만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 중이다. 책 뒤에 필기체로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신용석 인천시립박물관 운영위원장은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특파원으로 국립도서관을 드나들다가 우연히 특종을 한 것에 불과하다. 직지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것을 한국에서 사 간 사람이 대단한 것이다. 직지가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왔다는 사실은 프랑스의 문화 수준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수집가인 콜랭 드 플랑시가 ‘직지’를 처음 접했을 때를 상상해본다. 중국어(한자)를 읽고 말할 줄 알았던 공사는 서책을 훑어보고 내용을 파악했을 것이다. 그리고 판매자가 희망하는 가격에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공사는 구텐베르크(1406?~1468)를 틀림없이 알고 있었으리라. 그렇지 않고서는 자비로 고가 매입을 결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직지’ 상권을 생각하면 공사의 안목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작품도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야만 비로소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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