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주 매매 두 얼굴]①말만 주주 위하는 척…결국 대주주만 유리
소액주주·기관 ‘자사주 소각’ 요구 봇물
"회사가 배당을 늘리고 1000억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 계획을 밝힌 것은 환영하지만 자사주 매입이 우호 지분 확보 등 다른 목적으로 이용돼선 곤란하다. 자사주 매입은 소각까지 이뤄졌을 때 비로소 주주가치로 환원될 수 있다." 지난달 30일 강성부 대표가 이끄는 행동주의펀드 KCGI는 DB하이텍 지분 7.05%를 취득했다고 밝히면서 DB하이텍에 자사주 소각과 독립적인 이사회 구성도 요구했다.
행동주의펀드뿐만 아니라 개인 투자자들도 올해 열린 여러 주주총회에서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 '자사주 소각'은 올해 자본시장의 주요 키워드 중 하나다. 기업들이 주주환원 명목으로 자사주를 매입하지만, 대주주의 경영권 방어나 의결권을 강화하는 식으로 자사주를 활용해왔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주주환원을 위해 자사주를 매입한다고 강조하지만, 소각 없는 자사주 매입은 레토릭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자사주 매입 후 교환…경영권 방어 목적으로 활용
기업이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활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자사주 맞교환이다. 자사주 매입 후 지배주주에 우호적인 기업과 자사주를 맞교환해서 서로 지배력을 강화하는 방식이다.
지난해 현대차는 KT와 750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맞교환(5년간 처분 제한)했다. 현대차와 현대모비스는 KT 주식을 각각 4.69%, 3.1% 보유 중이다. KT 역시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주식을 각각 1.04%, 1.46% 갖고 있다.
이들이 자사주를 맞교환하면서 밝힌 목적은 사업 시너지 효과였다. 증권가는 이를 우호적인 의결권 확보로 보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지배구조 개편 과제를 안고 있어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대기업 계열사 간 상호출자를 금지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현재 현대모비스→ 현대차→ 기아→ 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다. 정의선 회장을 중심으로 순환출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현대차는 2018년 현대모비스 인적분할로 지배구조를 개편하려고 했지만 주주의 반대로 무산됐다. 시장이 KT와 자사주 맞교환을 단지 사업 목적으로 보지 않는 이유다. 자사주는 원래 의결권이 없는 주식이다. 그러나 자사주를 매각하면 의결권이 부활한다. 경영권 분쟁을 겪거나 오너 일가의 지분율이 낮은 기업이 주로 자사주 맞교환에 나선다.
다만 자사주 맞교환이 주주에게는 달갑지 않은 측면이 있다. 지분 교환으로 배당이 희석되기 때문이다. 맞교환한 자사주에 돌아가는 몫만큼 기존 주주의 배당금이 줄어든다. 예컨대 현대차와 현대모비스가 가져간 KT 지분은 7.79% 수준이다. 올해 KT 주당배당금(DPS) 1960원 기준으로 약 155원이 줄어드는 효과가 나타난다.
자사주를 맞교환한 만큼 시장에서 다시 자사주를 매수하면 희석된 배당가치는 회복된다. KT는 약 7.7%를 시장에서 자사주로 사들인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시점은 공개하지 않았다.
자사주의 마법과 대주주 위한 표 응집력 강화
올해 부쩍 늘어난 인적분할 결정도 자사주 소각 목소리가 커진 배경이다. 인적분할은 물적분할 때와 달리 지분율대로 신설법인 주식이 생긴다. 이때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도 의결권을 가진 주식으로 바뀐다. 이를 '자사주의 마법'이라고 부르다. 대주주 입장에서는 지주사 체제로 지배구조를 개편하고, 신설법인에 대한 지배력도 확대할 수 있는 요긴한 수단이다.
이상헌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분할과 동시에 별도의 지분 취득 과정 없이 두 회사의 지분 관계가 자동으로 형성된다"며 "대주주가 돈을 내고 지분을 취득하는 대신 배당 가능 이익인 자사주를 이용해 지배력을 강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사주 비중이 큰 것도 지배주주에 유리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총 '특별결의'에서 대주주의 표 응집력이 강화된다는 해석도 있다.
기업 정관 변경, 이사·감사 해임, 주주 이외의 상대에게 전환사채(CB)·교환사채(EB) 발행, 사업에 영향을 미치는 영업권 양수 등 중요한 사항은 '특별결의'로 결정한다. 특별결의안은 발행주식 총 수의 3분의 1 이상, 출석한 주주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통과된다.
이상헌 연구원은 "특별결의안 표결에서 찬반이 팽팽하게 마련인데, 자사주 비중이 15% 이상으로 높으면 지배주주에 유리한 경향이 있다"라며 "지배주주에 반대할 가능성이 있는 의결권이 자사주 주식만큼 배제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사례들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인으로 꼽힌다. 미국의 경우 기업이 자사주를 매입하면 대개 주가가 오른다. 자사주 매입 후 대부분 소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자사주를 소각하면 총 주식 수가 줄면서 주당순이익(EPS)이 상승하는 효과가 있다. 국내 기업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대주주와 소액주주의 이해상충 배경에는 자사주를 매입한 후 소각하지 않는 관행이 있다"라며 "자사주 매입은 소각으로 이어져야 진정한 주주환원으로 귀결될 수 있기에 기관 투자자를 중심으로 자사주 소각을 유도하는 의견 개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황윤주 기자 hy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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