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정자, 리움미술관에 노숙자로 등장한 이유는?

장지영 2023. 4. 12.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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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카텔란 개인전 연계 특별공연… 16명 배우가 40여개 캐릭터 소화
김아라 연출한 침묵극 ‘우리가 서로를 알 수 없었던 시간’ 콘셉트 가져와
11일 서울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WE&WE?’ 공연에서 원로 배우 박정자가 노숙자로 등장해 벽에 기대고 있다. 리움미술관

요즘 서울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마우리치오 카텔란 개인전 ‘우리(WE)’의 예약 전쟁이 뜨겁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현재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작가로 꼽히는 카텔란의 명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카텔란은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관객의 인식과 가치체계를 흔드는 작품을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어 2019년 아트 바젤 마이애미에 출품돼 12만 달러(약 1억5000만원)에 판매된 ‘코미디언’(2019년)을 보자. 벽에 바나나를 은색 테이프로 붙인 이 작품은 ‘예술이냐, 사기냐’ 논란 속에 현대 미술시장에 대한 카텔란의 통렬한 유머를 보여준다.

지난 1월 31일 시작한 카텔란 개인전 ‘우리(WE)’에는 ‘코미디언’을 비롯해 카텔란의 작품 38개가 전시돼 있다. 운석에 깔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실물 조각, 실탄을 쏴 구멍 낸 검은 성조기, 머리를 바닥에 박은 채 거꾸로 선 두 제복 경찰, 무릎 꿇고 기도하는 소년 형상의 히틀러, 냉장고 속에 앉아있는 중년 여인, 미술관 입구와 로비에 각각 누워있는 노숙자 등 냉소적이고 풍자적인 인간희극이 펼쳐져 있다. 여기에 100여 마리의 박제된 비둘기를 비롯해 다양한 동물 박제상들은 불안하고 잔인한 삶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11일 마우리치오 카텔란 개인전이 열리는 리움미술관에서 ‘WE&WE?’라는 타이틀의 공연이 열렸다. 16명의 퍼포머들은 옷을 갈아입으며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11일 오전 카텔란 개인전이 열리는 리움미술관에서 독특한 공연이 펼쳐졌다. ‘WE&WE?’라는 타이틀이 붙은 이 공연은 원로 배우 박정자가 노숙자로 등장하는 등 전시장 전체를 무대로 16명의 배우가 퍼포먼스를 펼친다. 김아라 연출가가 지난 2019년과 2021년 공연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침묵극 ‘우리가 서로를 알 수 없었던 시간’의 콘셉트를 일부 차용하면서 전시작품인 ‘유령’(전시장 곳곳에서 사람들을 보는 박제된 비둘기들)의 모티브를 딴 것이다.

관람객은 공연이 시작되고 나서 약 5분이 지날 때까지도 공연이 시작됐는지 모른다. 배우들이 전시장 안에서 관람객과 섞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전시장과 어울리지 않은 의상을 입고 등퇴장을 거듭하며 퍼포먼스를 펼치는 배우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노숙자 역의 박정자를 제외하고 15명의 배우는 조깅하는 남녀, 경찰관, 청소노동자, 웨딩드레스 입은 신부, 광대, 마술사 등 다양한 인간군상은 불안한 분위기를 조장한다.

줄거리가 없지만, 관람객들은 1시간 동안 진행되는 공연의 흐름을 느낀다. 그리고 다양한 인간군상을 통해 각각 일상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퍼포먼스가 펼쳐지는 동안 관람객들은 어느 순간 서로를 의식하게 되는데, 고립과 소외에서 만남과 화합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1일 마우리치오 카텔란 개인전이 열리는 리움미술관에서 김아라가 연출한 공연 ‘WE&WE?’가 이뤄지고 있다.

리움미술관 회원을 대상으로 열린 이날 공연은 배우 박정자와 연출가 김아라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카텔란 개인전 ‘우리(WE)’를 보러온 두 사람은 전시의 주제나 작품 속 캐릭터들이 ‘우리가 서로를 알 수 없었던 시간’과 여러 부분에서 연결된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전시장에서 공연하면 좋겠다는 김아라의 제안을 박정자가 리움미술관에 전달하면서 빠르게 진행됐다. ·

리움미술관의 김영광 선임은 “리움미술관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폭넓은 세대, 감성과 소통하며 장르를 넘나드는 경험을 제시하고자 한다”면서 “이번 공연은 전시장이라는 공간에서 관객과 어우러져 전개되는 연극으로, 전시장 전체가 크고 작은 무대가 되고, 관객들은 무대 속에서 관찰자이자 이방인으로서 질문하고 교감하게 되는 시간을 보내게 하는 의도로 기획됐다”고 밝혔다.

김아라 연출가는 전시와 연결된 40여 개 캐릭터를 16명의 배우가 소화하는 시놉시스를 만든 뒤 열흘간 연습을 했다. 이들 가운데 박정자 등 10명은 앞서 김아라의 ‘우리가 서로를 알 수 없었던 시간’에 출연한 만큼 이번 공연을 바로 이해했지만, 나머지 6명은 낯선 형식이라서 처음엔 어색해하기도 했다. 김아라 연출가는 “전시를 본 뒤 즉물적으로 공연 제안을 했는데, 리움미술관에서 실제로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면서 “배우들은 새로운 형식의 이번 공연을 통해 관객과 가깝게 소통하는 쾌감을 맛봤다고 한다. 또한, 예술가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관객들이 새로운 형식의 공연을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고 말했다.

글·사진=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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