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꾀병으로 보일까봐"…직장인 절반, 아파도 참고 출근한다
중견기업에서 일하는 이모(32)씨는 최근 장염에 걸려 밤새 고생하고도 다음 날 통증을 참고 출근했다. 팀 인원이 부족한 데다 업무가 한창 바쁠 시기라 아프다고 연차를 쓰기엔 눈치가 보여서다. 이씨는 “상사 눈 앞에서 쓰러지지 않는 이상 꾀병으로 비춰질 것 같아 연차 쓰기 어렵다”며 “주변에서도 아픈데 꾸역꾸역 출근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의 절반 이상이 신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가 아닌데도 직장에 출근하는 현상을 의미하는 프리젠티즘(presenteeism)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사나 부서원들 눈치가 보여서, 혹은 유급병가와 같은 제도가 없어서 소득이 줄어들까봐 ‘아파도 출근’을 선택하는 것이다.
직장인 50.5% ‘아파도 출근’…“사회적 비용도 증가”
11일 한국노동연구원의 노동정책연구에 실린 ‘임금노동자 프리젠티즘 결정요인 비교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임금노동자 1585명을 대상으로 ‘지난 12개월 동안 평소와 같이 업무를 수행하기 힘들 만큼 몸이 아픈데도 직장에 나와서 일을 한 적이 있는가’를 묻는 질문에 50.5%가 “그렇다”고 답했다. 이는 지난해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임금노동자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프리젠티즘 경험 비율(51.4%)과도 유사하다.
프리젠티즘은 노동자 개인의 건강 악화는 물론이고 사회적 비용까지 증가시킬 우려가 있다. 이번 연구를 진행한 신희주 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는 “그동안 아파도 출근한다는 것이 일종의 직업윤리로 인식돼 노동문제로서 관심을 받지 않았다”며 “프리젠티즘은 노동자들의 삶의 질과 미래의 고용에 위협이 되고, 업무능력 저하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간접비용이 결근으로 인한 비용보다 더 크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밝혔다.
저임금일수록 프리젠티즘 노출…유급병가 유무도 영향
노동조건별로 프리젠티즘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본 결과, 임금이 낮을수록 ‘아파도 출근’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몰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체적으로 저임금 노동자는 ▶초과 노동 ▶대체인력 존재 ▶동료나 상사의 지지 ▶휴식시간 선택의 자유 ▶충분한 작업시간 등 모든 직업환경 요소들이 프리젠티즘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반면 고임금 노동자는 ‘휴식시간 선택의 자유’ 변수만이 영향을 미쳤다.
특히 저임금 노동자에겐 회사에 ‘유급병가’ 제도가 있는지 여부도 프리젠티즘에 영향을 줬다. 저임금 노동자로선 유급병가 제도를 통한 소득 보전 없이는 아파도 마음 놓고 쉬긴 어려운 것이다.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연차휴가와 달리 유급병가는 개별 회사의 취업규칙에 따라 운용되는 제도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취업규칙에 유급병가가 명시된 10인 이상 사업장은 7.3%에 불과했다. 유급병가 제도가 없다면 무급병가를 내거나 연차를 사용해야 한다.
“유급병가 제도화…노동조건 개선도 필요”
프리젠티즘을 억제할 수 있는 대안으로 신 교수는 ‘유급병가의 제도화’를 강조했다. 그는 “유급병가 혜택이 없으면 질병 치료를 포기하는 사람의 비율이 증가하게 되며, 이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며 “근로기준법 개정을 통한 유급병가의 의무화는 노동자 건강권과 삶의 질을 보장할 수 있는 기본적인 요건”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신 교수는 “노동조건의 근본적인 개선을 위해 현행 노동법이 적정 노동시간·작업장 자율성 확보·충분한 작업 인력·합리적인 임금수준 등 노동자 권리 확보에 적절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 논의가 필요하다”며 “직장 내 괴롭힘 방지 등 긍정적인 직장 문화를 뒷받침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세종=나상현 기자 na.sangh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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