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사라진 기다림, 사랑의 기다림
분주한 출근길에 내가 ‘벌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시간이다. 만원 지하철을 뚫고 피크타임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하는 여정 동안 잠시도 기다림으로 지체하고 싶지 않다. 시간표에 맞춰 집을 나서고, 이동 중엔 40분짜리 유튜브 영상을 1.5배속으로 보고, 하차 전 역에서 ‘패스오더’(원거리 주문 서비스 앱)로 미리 주문한 커피를 챙겨 사무실로 출근한다. 기다림을 모두 제거한 덕분에 20분의 ‘시간’을 벌었다.
빅데이터 분석 알고리즘의 고도화로 시간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기술과 서비스가 발전 중이다. ‘통제 가능성’과 ‘예측 가능성’은 세계의 불확실성이 심화될수록 더 유용한 성능이며 이 성능은 시간을 축으로 구현된다. 비대면 진료 앱, 식당 줄서기 앱 등의 서비스들은 불필요한 기다림의 시간을 최소화해 사람들에게 여분의 시간을 만들어 준다. 신한카드 빅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캐치테이블, 나우웨이팅과 같은 음식점 예약 및 웨이팅 대행 서비스 앱 이용건수는 2020년 1분기 대비 22배, 2021년 1분기 대비 9.7배, 2022년 1분기 대비 2.2배 증가로 꾸준한 상승세다. 더 많은 사람이 ‘시간을 벌고’ 있다.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는 성마른 시대라는 오해는 접어두자. 이렇게 획득한 시간은 역설적으로 또 다른 기다림으로 전이된다. 최근 한 약국 앞에 긴 줄이 늘어섰다. 약이 아닌 ‘부적’을 사기 위해서다. 긍정적이고 깜찍한 일러스트로 MZ세대의 사랑을 받고 있는 ‘최고심’이 홍대 ‘오브젝트’에서 진행 중인 ‘건강이 최고심’ 약국 팝업스토어가 인기다. 최고심은 이전에도 신한카드, 스파오, 코렐 등 업종 불문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으로 화제성과 흥행성을 모두 입증했다.
이번 행사에서는 신용카드나 잠옷, 그릇이 아니라 실용과는 거리가 먼 손바닥 크기만한 포토카드를 판매하는데, 입장 대기 시간이 두 시간 이상 소요될 정도다. 개당 500원인 이 포토카드에는 ‘우주가 나를 돕는 부적’ ‘무조건 잘되는 부적’ ‘걱정이 사라지는 부적’과 같이 따뜻한 응원의 메시지가 작가 특유의 귀여운 스타일로 그려져 있다. ‘나만’이 아닌 ‘모두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선물하는 경우도 많아 카드 봉투마저 인기다.
커피와 지하철을 기다리는 시간을 아꼈을 사람들은 애정 어린 응원이 담긴 카드를 사기 위해 기꺼이 기다림을 감수한다. 잘되길 바라는 마음의 공명을 위함이다. 분 단위로 관리하며 통제하는 현대인의 시간 감각은 사랑 앞에서 분침과 시침의 효력을 잃는다.
오픈런이나 웨이팅처럼 기다림을 기꺼이 감수하는 경험은 충분히 대중화됐다. 웨이팅은 이제 매력적인 공간이 제공하는 일종의 경험 콘텐츠로, 그때의 기다림은 비효율이 아닌 풍요의 시간으로 인지된다. ‘슬램덩크 팝업스토어’, 해외 유명 작가 전시회의 인기가 증명하듯 맛집이나 명품 브랜드 외에도 능동적 기다림의 장소들이 다양해지고 있다.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시간(time)’이라고 한다. ‘사람(people)’이나 ‘사물(thing)’보다 더 많이 사용된다. 시간은 사물과 현상을 설명하는 기본적 재료이면서, 관리는 까다로운 성질이고 인류에겐 신비로운 개념이다. 정확한 시간의 측정법을 발명한 인간의 고민은 이제 시간의 활용성으로 옮겨 왔다. 인간의 발명이 효율과 풍요를 지향한다면 효율은 불필요한 시간을 제거하는 개발의 관점에서, 풍요는 유의미한 시간을 확장하는 창작의 관점으로 기획되고 있다.
개발과 창작의 조화를 이루며 진행되는 시간의 변주와 협주는 더 빈번해질 것이다. 더 많은 시간이 효율의 심판으로 관리되면 될수록, 더 많은 시간을 자신이 사랑하는 것으로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이 늘어나길 바란다.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는 “진정한 사치란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한 ‘기다림의 시간’이라는 사치가 우리 삶에 온기와 의미를 더하길 바란다.
정유라 신한카드 빅데이터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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