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현의 시선] ‘중꺾마’ 안에 가족이 있었다

김승현 2023. 4. 12.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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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현 사회부디렉터

‘최고의 인간’은 울먹였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100호 골 위업을 달성한 손흥민은 지난 9일 경기가 끝난 뒤 “많은 분이 기억났지만, 지난주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가장 많이 생각났던 것 같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손흥민은 직전 경기에서도 추모의 검은 완장을 찼다. 영국 언론이 동료들의 말을 인용해 “최고의 남자, 최고의 선수, 최고의 인간”이라고 극찬한 순간, 손흥민은 손가락으로 하늘에 계신 외할아버지를 찾았다.

2015년 토트넘 유니폼을 입은 후 7년7개월 만에 EPL 100호골 기록을 세운 손흥민은 골을 터뜨린 뒤 최근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뜻에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해 카타르 월드컵에서 손흥민과 함께 16강 기적을 만들어 낸 황희찬도 애틋한 가족 이야기를 자주 한다. 최근 한 예능 프로그램에선 트레이드 마크인 ‘손목 키스’의 뒷얘기를 소개했다. 어릴 때부터 돌봐준 할아버지(黃湧洛)·할머니(徐廷淑)의 한자 이름을 손목에 새겼다. 황희찬은 “골 넣을 때마다 감사드린다는 마음으로 손목 키스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축구대표팀 공격수 황희찬은 2022 카타르월드컵 일정을 마친 직후 조부모를 찾아 16강 진출 기쁨을 나눴다. 황희찬 인스타그램

「 100호 골 외조부께 바친 쏘니
아버지 유언 문신한 미국 골퍼
가족애는 생사 뛰어넘는 연대

세계 스포츠계가 추앙하는 업적을 일군 스타의 곁에도 가족이 있었다. 월드 클래스에 가슴이 웅장해졌던 팬들은, 익숙하고 소박한 가족 이야기에 공감대가 팽창한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더니 그 마음의 중심에 가족이 있었다.

EPL 100호 골은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34번 있었던 대단한 성과다. 현역 선수로는 손흥민을 포함해 8명이 기록했고, 아시아 축구 선수로는 처음이다. 그런 대기록을 세운 선수가 외조부상을 얘기하며 울먹이자 바다 건너의 팬들은 문상객 심정이 됐다. “월클 선수로 뛰느라 사랑하는 가족의 마지막에 함께 하지 못했구나” “엄마에게 미안하고 손자로서 마음 아프겠구나” 등등. 위인 반열의 스타는 잠시 92년생 한국 청년이 됐다. 가족이란 말이 일으킨 마법 아닐까.

가족 같은 팬들은 SNS 등에서 이젠 상갓집 수다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외모를 손흥민이 많이 닮았다더라. 외조부-엄마-손흥민으로 이어지는 DNA의 유전이 있었겠지. ‘연결고리’인 엄마는 손흥민의 월드 클래스 추모가 얼마나 큰 위안이 됐겠어, 그게 진짜 효도지. 정보와 추측이 뒤섞인 시시콜콜한 가족사를 들먹이며 ‘나이스 원 쏘니’를 위로한 셈이다.

다른 우주에 있는 것 같던 스타도, 연락이 뜸했던 지인도 가족의 애경사와 마주할 때면 더 애틋하게 느껴진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느낌들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아프면 아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가족애(愛)가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애의 애틋함은 만국 공통이다. 지난 10일 끝난 세계 최고의 골프대회 마스터스에서는 23세 아마추어 골퍼의 가족사가 짠하게 다가왔다. 아마추어 선수 중 유일하게 1, 2라운드 컷을 통과하며 세계적인 골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미국의 신예 샘 베넷은 왼쪽 손목에 있는 암호 같은 문신이 화제가 됐다. 한눈에 알아보기 힘든 조악한 글씨 문신은 처음엔 MZ 세대 특유의 못 말리는 개성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알고 보니 2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유언을 새긴 것이었다.

8년간 알츠하이머로 투병한 베넷의 아버지는 2021년 6월,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숨지기 1년 전 아들의 부탁을 받고 인생의 조언을 직접 써줬다고 한다.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라 15분에 걸쳐 힘겹게 적은 문장은 ‘Don’t wait to do something.-POPS(주저하지 말아라.-아빠가)’였고, 그 글씨가 그대로 아들의 손목에 남았다. 아버지의 유지는 베넷이 경기 때마다 마음을 다잡는 루틴이 됐다. 그는 “(처음 출전한 마스터스 경기를) 아버지가 하늘나라에서 지켜보고 계시는 걸 느낄 수 있어요. 내려다보는 뷰가 좋을 테니 짜릿하실 거예요”라고 말했다.

미 아마추어 골프 선수 샘 베넷의 손목 문신. 마스터스에 첫 출전한 베넷은 알츠하이머를 앓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Don’t wait to do something.-POPS(주저하지 말아라.-아빠가)"라고 힙겹게 쓴 조언을 그대로 문신으로 새겼다. PGA투어 페이스북 영상 캡처.


가족애는 생사의 경계마저 관통하는 초현실적 연결이며 연대(連帶)다. 소중한 가족을 떠나보낸 사람이라면 베넷의 아버지가 아들의 문신으로 ‘부활’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마스터스 신인의 꺾이지 않는 마음이 되어, 오거스타의 바람이 되어 패기 넘치는 스윙을 도왔을 게 분명하다.

10여 년 전 건강한 가족공동체의 조건을 다룬 『가족력(力)』이라는 책을 쓴 김성은씨는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가족에 대해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분석을 했다.

“가족이 한 사람을 망가뜨릴 수도 있고,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 100%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나마 좀 건강한 방식으로 삶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어떤 단계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을 비축할 수는 있다. 그 힘이 가족 안에 있다.” 오늘 하루, 너무 익숙해서 안중에도 없을 지경인 가족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져보자. 영원히 이어질 소중한 연결이자 힘이니까.

김승현 사회부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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