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의 마음 읽기] 문단 차력사가 된 기분
지난해 두 권 합해서 800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을 펴내고 문학 담당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다가 같이 저녁도 먹게 되었다. 요즘 이렇게 두꺼운 소설 잘 안 나오는데, 트렌드에 안 맞는다, 그런 얘기를 했다. 그 전에 소설집을 내고서도 편집자와 같은 대화를 나눴다. 요즘 이렇게 우울하고 사실적인 분위기의 소설집 잘 안 나오는데, 트렌드에 참 안 맞아요. 고양이라도 넣을 걸 그랬나.
내 책들이 트렌드에 안 맞는다는 걸 상대가 나에게 알려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도 알고 상대도 알고 내가 안다는 것을 상대도 알고 상대가 안다는 것을 나도 알았다. 그냥 푸념, 탄식, 혹은 자학 개그 같은 얘기였다. 한편으로는 요즘 세상에 기자나 편집자라는 직업도 그렇게 트렌디해 보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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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글 읽는 사람 점점 줄어들어
숏폼·웹소설·영화에 사람 몰려
글에 대한 사랑 다시 다짐한다
」
“차력사가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문단 차력사.” 기자들과 저녁 자리에서 내가 그렇게 말했고, 다들 웃었다. 따로 설명하지 않았지만 다들 뜻을 알아들었다. 내가 매달려 추구하는 일은 힘든 일이다. 다른 사람들도 인정한다. 하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듯 보이며 진지한 관심을 불러 모으지도 못하는 것 같다. 얼굴 근육에 잔뜩 힘을 주고 기합을 지르는 내 모습은 신기한 구경거리, 어쩌면 웃음거리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에 만난 소설가는 최근 웹소설을 쓰고 있다며 “다음 세대에는 종이책 읽는 사람이 남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며칠 전 들은 경제 팟캐스트의 게스트는 “이제는 숏폼의 시대”라며 모든 콘텐트가 짧은 길이의 영상으로 바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외에도 여러 바람이 느껴진다.
어떤 때에는 정신을 차려 보니 그런 흐름 한가운데에 있다. 독서 인구는 줄어드는데 한국 영화, 한국 드라마는 세계를 호령한다. 소설가와 출판사에 책 판매로 버는 인세 수입은 줄고 영상화 권리를 팔아 얻는 판권 수입이 늘어난다. 그러다 보니 책을 책이 아니라 영상물의 원작으로 보는 출판사들도 생겨났다. 그런 출판사들은 자신을 ‘스토리 회사’ 등으로 소개하며, ‘영상화 기획 소설’을 만든다.
나도 영상 판권을 몇 건 판매했고, 기실 IP(지식재산) 비즈니스 덕을 톡톡히 본다. 거기까지는 오케이고 생큐다. 하지만 IP 비즈니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런저런 제안들을 해온다. “같이 영화 시나리오 개발해봅시다”에서부터 “이 게임 세계관을 만드는 데 작가님이 필요합니다”까지. 내가 쓰는 소설에서 돈이 되는 부분은 글이 아니라 아이디어인데, 굳이 글을 쓸 필요가 있느냐, 아이디어만 빨리 만들어 달라고 한다. 돈도 더 주겠다고 한다.
그런 제안을 거절하면서 내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내가 ‘콘텐트 크리에이터’가 아니라 소설가라는 것. 글자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 동시에 그런 제안을 거절한 뒤 입맛이 쓴 것도 사실이었다. 내 작업이 돈이 되는 부분과 안 되는 부분으로 쪼개질 수 있고, 내가 돈이 안 되는 부분에 매달리고 있음을 직시해야만 했다. 솔직히 미련도 생겼다.
후배 작가나 기자들이 가끔 술을 사달라고 했다. 진지하고 불편한 글을 읽는 사람이 남지 않을 거랍니다. 모든 콘텐트가 숏폼이 된답니다. 소설은 이렇게 망하는 걸까요. 저널리즘은 이렇게 망하는 걸까요. 술자리에서 그런 푸념, 탄식, 혹은 자학 개그를 들었다. 그들은 단순히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의미 있는 일을 원했다. 의미가 그들의 발목을 잡은 덫이었다. 나는 어딘가에서 의식 있는 정치인이 ‘팬덤에 편승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정치는 이렇게 망하는 걸까’ 하고 고민하는 모습도 상상해봤다.
시대마다 맞서 싸워야 하는 대상이 있는 것 같다. 우리 시대의 적은 수익 극대화일까. 거기에 저항하는 일은 반독재 투쟁에 비하면 긴급 체포나 고문을 당할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다. 그런가 하면 방향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고, 자신이 걷는 길에 끝내 확신을 품기 어렵다는 나름의 고충도 있다. 그 길을 걷는 이유를 남에게 설명하기도 어렵다. 정치권력에 항거하는 사람과 달리 대중 권력, 소비자 권력에 맞서는 이에게는 ‘오만하다’는 비판이 뒤따른다.
어떤 후배 작가는 “오기가 생긴다”고 했고, 또 다른 작가는 “의미를 얻기 위해 계속 쓴다”는 글을 보내주었다. 어떤 후배 기자는 취재 내용에 살을 붙여 책을 쓰겠다며 조언을 구했고, 또 다른 기자는 뜻 맞는 동료 기자들을 모아 논픽션 공동 집필에 나선다고 했다. 나는 나대로 더 진지하고 더 불편한 새 원고에 착수한다. 거기에 실패한다고 누가 죽는 것도 아니니 아무래도 비장미가 서리지는 않고, 그냥 다 같이 차력을 하는 기분이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최근 낸 책들의 작가 소개란에 ‘문단 차력사’라고 적었다. 으라차차!
장강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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