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격노의 시대
우리는 지금 ‘격노(激怒)의 시대’를 산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경찰의 부실 대응에도 격노, 북한의 군용 무인기(드론)가 영공을 침범했는데 우왕좌왕한 군에도 격노, 아들의 학교폭력 논란으로 국가수사본부장 후보에서 사퇴한 정순신 변호사 논란에도 격노, 덮어놓고 밀어붙이다 사달 난 주 (최대) 69시간 근무제에도 격노…. 모아 놓고 보니 격노투성이다.
그런데 격노하는 주체가 윤석열 대통령이다. 주로 대통령실 관계자의 전언을 통해서다. 159명이 숨진 지난해 10월 29일 이태원 참사 당시엔 경찰의 부실 대응에 격노했다. 윤 대통령은 사고 후 주재한 국가안전시스템점검회의에서 “경찰은 왜 4시간 동안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었나. 참사를 철저히 진상 규명하고, 결과에 따라 책임 있는 사람에 대해 엄정히 책임을 묻겠다”고 말했다. 국민 안전을 지키는 최종 책임은 경찰일까.
지난해 12월 북한 무인기가 경기도 김포와 파주, 강화도는 물론 용산의 대통령실 인근 상공까지 무단 침범했는데도 우리 군은 격추에 실패했다. 당시 윤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이종섭 국방부 장관에게 “훈련도 제대로 안 하고 그동안 뭘 했나. 과거에 비슷한 일이 여러 번 있었는데, 어떻게 북한 무인기 공격에 대비하는 데가 없을 수 있느냐”고 질책했다. 역시 격노와 함께. 그렇다면 국가 안보의 최종 책임은 군일까.
지난 2월엔 신임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한 정순신 변호사가 아들의 학교 폭력 소송전 논란으로 하루 만에 낙마한 과정을 보고받고 격노했다. 격노의 대상이 정 변호사의 과거 전력인지, 정 변호사를 걸러내지 못한 인사검증 체계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정부 고위 공직자 인사 검증에 실패한 최종 책임은 누가 져야 하나.
반대 여론에 밀려 한발 물러선 주 (최대) 69시간 근무제는 고용노동부의 ‘홍보 방식’에 격노했다. 대통령실은 “정책 홍보 실패도 정책 실패다. ‘주 69시간 근무’란 극단적인 프레임이 씌워져 정책의 진의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국민의 근로 시간 체계를 바꾸는 정책의 최종 책임은 고용노동부 장관이 다 안고 가면 되나.
뭔가 이상하다. “내가 책임지겠다” 해놓고선 “내가 화내겠다”로 바뀌었다. 윤 대통령의 집무실 책상에 놓여있다는 명패 속 ‘The Buck Stops Here(책임은 내가 진다)’ 문구가 머쓱하다. 책임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대통령이 모두 책임질 수도 없다. 1979년 준공한 성수대교가 1994년 붕괴한 사고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에 나선 건 진짜 책임을 느껴서였을까. 책임지지 않더라도 “내 책임이다” 사과하면 어떨까. 사과 대신 쏟아내는 격노에, 국민이 격노할 지경이다.
김기환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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