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도청과 국익
“오만방자한 새끼들, 대한민국을 얼마나 졸로 봤으면 대통령 책상에다 도청장치를 달아!”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박통’ 역을 맡은 배우 이성민은 청와대 전화기를 내동댕이친다. 미국 CIA가 청와대를 도청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상황이었다. 영화 초반 중앙정보부장(이병헌)이 이인자 싸움에서 경호실장(이희준)에 밀리는 계기로 작용하는 장면이기도 했다.
이 장면이 지칭하는 때는 1970년대 중후반이다.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언급, 한국의 핵개발 추진을 두고 한·미가 신경전을 벌일 때다. 1976년 10월 워싱턴포스트는 한국 정부가 박동선씨를 앞세워 미국 의회에 현금을 뿌렸다고 보도했다. 이 정보가 어떻게 새 나왔을까.
보도 이후 미국 정부가 하원 국제관계소위원회에 제출한 문서를 보면 답이 나온다. 문서엔 ‘대미 로비 활동은 박씨로 일원화한다’고 결정한 청와대 비공개회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미국 정부가 청와대에서 오간 밀담을 도청했다는 의혹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은 중요한 얘기는 청와대 앞뜰에서 했다고 한다.
도청은 미국이 세계 동향을 살피고 국제 전략을 짜는 기초 자료였다. 1970년대 초중반 미국은 필리핀 동쪽 군도 미크로네시아까지 도청했다. 미크로네시아는 미국 신탁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독립하려는 뜻이 있는 건 아닌지 미국은 정치요인들의 비밀 얘기를 엿들었다. 미크로네시아는 한국·일본과 함께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방어기지였기 때문이다. 해당 도청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1976년 사설에서 “법과 정부 통제를 초월하는 악습”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악습은 끊지 않았다. 전 CIA 요원 에드워드 스노든은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메르켈 독일 총리를 비롯해 35개국 정상을 도청했다고 2013년 폭로했다.
또 미국의 도청이 논란이다. 최근 소셜미디어에 유출된 미국 기밀 문건에서 한국 국가안보실 사람들 대화를 엿들은 듯한 대목이 발견됐다. 미국 정보기관들도 도청 사실을 딱히 부인하지 않고 있다. 자국 이익 앞에서 아군과 적군의 경계가 흐려지는 국제 정치의 생리가 새삼 확인됐다. ‘한·미 동맹’을 여러 번 곱씹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국익이라는 냉정한 현실 앞에서 동맹이라는 낭만적 수사(修辭)는 왜소해지는 법이다.
윤성민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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