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돌 서바이벌이 다시 돌아왔다! 5세대 아이돌 파헤치기
5세대 아이돌의 서막
1981년생부터 2012년생까지를 한 세대로 묶는 MZ세대. 연장자와 막내의 나이 차가 30년쯤 되는 MZ세대 모임은 젝스키스를 모르는 1998년생과 엔하이픈이 낯선 1988년생이 엑소의 노래를 함께 부를 수 있는 탄력적인 집단이다. 그들은 서로가 10대 시절에 향유한 K팝을 확인하고 공유하며 공감대를 형성한다. 실제로 H.O.T., 젝스키스, 핑클, S.E.S., god로 대표되는 1세대 아이돌 멤버들이 대부분 1978년생부터 1982년생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후 세대 역시 비슷한 터울로 일정한 그룹을 이루고 있어 ‘MZ세대’는 아이돌 문명과 함께 탄생하고 진화하는 것이라 봐도 무리가 없다. 2023년 현재, 1세대 아이돌은 ‘뉴트로’라는 트리뷰트 형태로 20주년 기념 공연을 마쳤고, 2세대 아이돌은 독립해 각자의 레이블을 만들거나, ‘K팝’ 장르를 벗어난 다양한 영역으로 자리를 확장했다. ‘유튜브 K팝’ 시대로 불리는 3세대는 군 입대와 계약 만료 시즌이 겹쳐 과도기에 놓여 있지만, 이미 안정적인 팬덤을 갖고 있어 대다수의 그룹이 해체가 아닌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4세대 아이돌의 전성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당신의 손으로 만드는 5세대 아이돌’이란 슬로건이 나타나버린 것이다.
마침내 5세대 아이돌, 〈보이즈 플래닛〉
거대한 피라미드에 앳된 얼굴의 K팝 기획사 연습생들이 입장한다. 자기들끼리 1위 자리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다가 트레이닝을 도와줄 심사위원 군단이 등장하자 긴장한 듯 자세가 굳는다. 회사별로 팀을 이뤄 준비한 무대를 선보이면 보컬과 댄스의 능숙도에 따라 그룹이 확정된다. 100여 명의 연습생은 큰 수련원에서 함께 합숙을 하고, 선배 K팝 그룹의 노래를 커버하며 여러 차례의 순위 발표식을 통해 생존하거나 낙오한다. 이 과정에서 시청자들은 자신이 선택한 연습생의 데뷔를 위해 온갖 경품을 걸어 투표를 독려하고, 유력한 생존 후보 연습생을 견제하기 위해 여론전을 펼친다. 이것은 2016년부터 4개의 시즌을 거듭한 〈프로듀스 101〉 시리즈에 대한 설명이면서 동시에 2022년 방영한 〈걸스플래닛999 : 소녀대전〉, 2023년 현재 방영하고 있는 〈보이즈 플래닛〉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외국 국적의 그룹과 한국 국적의 그룹을 나누는 미미한 변화가 있을 뿐 두 시리즈엔 어떤 차이도 없다. ‘국민 프로듀서’가 ‘스타 크리에이터’로, ‘트레이너’가 ‘마스터’로 바뀐 건 그냥 웃기려는 말장난이 아닌가 싶은 정도다. 대중음악평론가 스큅이 2020년 웹진 〈아이돌로지〉에 기고한 ‘K팝 아이돌 세대론’은 한국 아이돌 그룹의 모호했던 세대 구분에 산업적·문화적 맥락을 토대로 ‘K팝 아이돌의 탄생’, ‘K팝 산업구조의 정착’, ‘(유튜브 플랫폼에 기반한)K팝의 탈영토화’, ‘(한국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이 희미해진)K팝의 재영토화’라는 타이틀을 붙여 구분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NCT, 세븐틴, 몬스타엑스, 블랙핑크, I.O.I, 워너원으로 대표되는 ‘3.5세대’ 아이돌에 대한 정의다. 이 세대는 Mnet 〈프로듀스 101〉의 영향을 받아 활동하거나 해당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한 그룹으로 국내 K팝 팬덤의 아이돌 그룹 소비 경향이 구체화된 3세대 K팝 그룹의 특성과 국가의 경계에 구애되지 않고 국외 활동만으로 수익 창출이 가능한 4세대 K팝 그룹의 특성이 혼재한다. 〈보이즈 플래닛〉은 상술한 3.5세대 아이돌의 전형적인 특징을 모두 갖춘 서바이벌이다. 비록 투표 조작 사건으로 인해 활동이 무산됐지만 〈프로듀스X101〉을 통해 데뷔한 엑스원은 아이돌 흥행 지표라 불리는 앨범 초동 판매량에서 52만 장이라는 역대 신인 아이돌 데뷔 앨범 최고 판매량을 기록했다. 몰락을 자처했으나, ‘프로듀스’ 시리즈가 방송 이상의 결과를 창출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기에 방송사는 ‘글로벌 투표’와 ‘5세대 아이돌’이라는 스스로 만든 면죄부를 손에 쥐고 〈프로듀스 101〉이 만든 영광을 그대로 재현하려 한다.
그 어떤 세대에도 호명받지 못한 아이돌, 〈피크타임〉
K팝 아이돌의 이름과 히트곡으로 세대를 촘촘하게 구분하고 시대의 흐름을 느끼는 MZ세대에겐 저마다 아픈 손가락으로 불리는 아이돌 그룹이 있다. 10명 중 7명이 아는 그룹, 이들은 그룹 존망의 슬픔을 등에 지고 기회를 찾아 〈더 유닛〉 〈믹스나인〉과 같은 ‘재데뷔’ 서바이벌에 나오기도 한다. 10명 중 3명이 아는 그룹, 이들은 운이 좋아서 곡을 잘 받았을 경우 몇 년 뒤 〈슈가맨〉에 나오거나 유튜브에서 ‘숨겨진 명곡’으로 회자되기도 한다. 그리고 10명 중 1명만 알거나 언급조차 되지 않는 그룹. JTBC의 〈피크타임〉은 바로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다. 〈피크타임〉에 참가한 24팀의 보이 그룹은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신인’, 활동 중이지만 인지도 확보가 필요한 ‘부스터’, 데뷔 후 계약 종료, 해체, 군 입대 등으로 활동을 중단한 ‘활동 중지’ 총 세 그룹으로 분류된다. ‘팀 1시’, ‘팀 14시’ 등의 시간으로 호명되는 이들은 탈락하거나 최종 라운드에 가서야 자신들의 진짜 그룹명을 공개할 수 있다. 구성은 익숙하다. 준비한 무대를 보고 심사위원들이 개인의 기준으로 합격과 탈락을 정한 뒤, 회의를 통해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는 심사형 오디션으로 〈팬텀싱어〉 〈싱어게인〉 〈풍류대장-힙한 소리꾼들의 전쟁〉으로 구축된 JTBC의 기존 음악 경연 서바이벌 포맷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다양한 세대로 구성돼 있던 기존 JTBC 서바이벌과 다른 점을 찾자면, K팝 아이돌 그룹을 평가하는 방송인 만큼 30대에 접어든 2세대 아이돌들에게 심사를 맡겼다는 것 정도다. 하이라이트의 이기광, 소녀시대의 티파니, 슈퍼주니어의 규현, 2PM 출신의 박재범, 인피니트의 성규, 위너의 송민호는 자신들만큼 주목받지 못한 보이 그룹의 무대를 보며, 선배로서 도움이 되는 코멘트를 아끼지 않고, 동료로서 경쟁을 함께 했던 이들에게 위로를 보낸다. ‘대국남아’, ‘24K’, ‘BTL’, ‘로미오’, ‘IN2IT’…. 생소한 이름의 그룹 멤버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데뷔가 끝인 줄 알았다”라는 말을 한다. 적자생존의 당연한 법칙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전기가 끊긴 숙소에 살다가 어느 날 회사 대표의 야반도주를 겪은 사연이나, 아르바이트를 몇 탕씩 뛰면서도 끝까지 아이돌의 꿈을 놓지 않는 이유, 연습하는 모습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단체로 기합을 받은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면 이 프로그램은 단순히 ‘망한’ 아이돌 그룹의 재기를 위한 서바이벌이 아니라 일부 장사꾼들이 데뷔를 담보로 저지른 연예인 지망생 피해자들의 고발 르포처럼 보인다. 〈피크타임〉은 초반 이러한 우여곡절을 노출해 시청자들의 관심을 얻는 데 성공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공정한 기회와 트레이닝을 받지 못한 이들을 위한 방송이 굳이 서바이벌이란 포맷 형식을 택해야 했냐는 의문을 마주하기도 한다.
슬픔 없이 데뷔할 수 있다면
2022년은 뉴진스, 르세라핌, 아이브 등 대중성과 팬덤을 모두 장악한 걸 그룹의 활약이 돋보였던 한 해다. 이로 인해 해외 시장을 상대로 고정적인 소비자층 장악에 좀 더 힘을 쓰는 보이 그룹은 위기론이 대두됐고, 미디어는 ‘무주공산’이라 불리는 그 자리를 위해 불변의 흥행 전략인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마련해 새로운 세대의 보이 그룹, 새롭게 기회를 얻은 보이 그룹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아이돌의 역사가 곧 나의 역사인 MZ세대에게 새로운 세대의 아이돌은 현재를 느끼고,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하는 지표가 된다. 그러나 가끔은 세대를 교체하려는 인위적인 움직임 속에 발생하는 수많은 낙오가 내 삶처럼 느껴지기도, 누구도 보장해주지 않는 생존 이후의 삶을 ‘데뷔’라는 목표에 숨기는 어른들의 무책임함이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돌’, ‘K팝’이라는 키워드로 하나되고 구분되는 ‘K팝 제너레이션’. MZ세대에게 미디어가 취하는 서바이벌이란 불패 전략은 익숙한 절망이다. 〈보이즈 플래닛〉과 〈피크타임〉은 지향하는 바가 다르지만 두 작품이 만나는 지점에는 아이돌 문화와 함께한 ‘각자도생’ 세대의 슬픔과 불안이 존재한다. 두 방송이 어떤 결과를 만들지 아직은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다가올 ‘5세대’는 이런 슬픔 속에서 갱신되지 않을 것이란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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