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격 맞은 듯 다 불탔다" 전쟁터 된 강릉… 8시간의 사투 [르포]

윤정민, 이찬규, 김민정 2023. 4. 11.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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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강원 강릉시 난곡동에서 발생한 산불이 주변 주택가로 번지자, 주민들은 망연자실하며 불길을 바라봤다. 이날 화재로 이재민 557명이 발생했다. 주민들은 순식간에 불길을 옮기는 강풍 때문에 불을 끌 생각조차 못한 채 지켜봐야 했고, 대부분 맨몸으로 대피했다. 연합뉴스

‘쿠와아아앙, 쾅쾅.’
태풍급 강풍이 휘몰아치자 비행기가 이륙하는 듯한 소음이 숲을 가득채웠다. 곳곳에 나무들이 쓰러져있었다. 겨우 살아남은 높이 10m가 넘는 나무에도 순식간에 불이 옮겨붙었다. 소방대원 두명이 호스를 붙잡고 화선(火線)에 접근해 물을 뿜어댔지만, 강한 바람에 물줄기는 주변으로 흩날렸다. 시야가 닿는 지표면 전체가 붉은 화염에 둘러쳐져 있었다. 하늘은 희뿌연 연기가 가득채웠다. 불과 수십미터 떨어진 곳엔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등록된 경포대가 있었다. 당국은 경포대에서 현판 7점을 떼어 인근 오죽헌박물관에 보관했다. 강릉 산불 발생 5시간이 지난 11일 오후 1시쯤 풍경이다. 산불이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강릉시 안현동의 한 마을에선 성 모양의 2층짜리 펜션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새카맣게 불에 타 있었다. 순간 강한 바람이 불자 지붕 위에 있던 철판이 통째로 날아가 인근에 주차된 자동차를 덮쳤다. 내부 집기류는 흔적도 없이 모두 불에 탔다. 50m가량 떨어진 목조 펜션은 아예 지붕이 주저앉았다. 펜션 뒤쪽 한옥도 모두 불에 타 마을 전체가 마치 폭격을 맞은 듯했다. 한옥 주인 최호영(75)씨는 “아침에 산불 났다는 말을 듣고 맨몸으로 대피했다가 다시 집에 와보니 집이 다 탄 상태였다”며 “40년 넘게 산 곳인데 추억이 담긴 사진 한장 못 건졌다”고 했다. 옆에 있던 최씨의 부인은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11일 오후 3시쯤 강릉시 저동 경포대 인근 주택가의 모습. 일부 벽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모두 불타서 무너졌고, 지붕을 이루고 있던 기왓장들도 바닥에 쏟아져 널부러졌다. 비가 내리며 큰 불길은 잡혔지만, 이때까지도 곳곳에 잔불이 남아 뿌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윤정민 기자

“단 30분만에 집 앞까지 불길”…강릉시 전역 8시간 사투


강릉시 난곡동 산24-4에서 이날 오전 8시 30분쯤 시작된 산불은 태풍급의 강한 남서풍을 타고 경포동 등 주변 주택가와 펜션 단지, 경포호와 사근해수욕장 등 해안선 근처까지 빠르게 번졌다. 강풍에 소나무가 쓰러지며 전신주를 건드린 것이 원인으로 조사됐다. 최초로 불을 발견했다는 조운현(69)씨는 “오전 8시쯤 TV를 보던 중에 갑자기 정전이 돼서 문 열고 나갔더니 소나무가 전선 위로 쓰러지고 뿌연 연기가 났다”며 “바로 밑 고사리밭으로 불이 번져서 삽으로 흙을 뒤엎으며 불을 껐는데, 바람이 너무 거세서 끄지 못했다. 사람이 날아갈 만큼 바람이 불었다”고 전했다. 조씨는 집과 차량 2대가 모두 불에 탔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오후 1시 30분쯤엔 화선이 8.8㎞에 달했다. 오후 4시 30분 완진 선언때까지, 강릉시 전역에서 글자 그대로 사투(死鬪)가 벌어졌다. 강원도와 소방당국 등은 산불 발생 약 1시간 10분 뒤인 오전 9시 43분 소방대응 3단계를 발령했다. 그러나 순간 풍속 30㎧에 달하는 ‘양간지풍(襄杆之風ㆍ양양과 고성 간성 사이에 부는 국지성 강풍)’이 계속 불을 밀어 붙이는 탓에 오후 2시 40분까진 소방헬기조차 뜨지 못했다. 소방과 공무원 등 2787명이 장비 403대를 동원했지만, 거센 바람을 탄 초반 불길을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잔불 수습 중이던 오후 4시 38분쯤 안현동의 전소 주택에선 전모(88)씨가 숨진 채 발견됐고 주민 2명은 2도 화상, 12명은 연기 흡입, 1명은 손가락 골절로 치료를 받고 있다. 인근 주민 557명은 아이스아레나와 사천중학교 등에 대피했다.

재산 피해도 막대했다. 완진 시점 기준 주택 42채와 펜션 9채, 상가 2채와 교회시설 1채, 차량 1대가 완전히 불탔고 주택 17채, 펜션 24채, 호텔 3곳이 부분적으로 피해를 입었다. 또 강원도 지정 유형문화재 50호인 방해정 일부가 소실되고, 경포호 인근 작은 정자인 상영정은 전소됐다.

11일 강원 강릉시에서 난 산불은 8시간동안 계속되며 문화재 등이 몰려있는 지역까지 덮쳤다. 강원도 지정 유형문화재인 '강릉 방해정(放海亭)'도 불로 일부가 소실됐다. 방해정 소유주의 며느리 이승희(63)씨는 "불이 옮겨 붙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하게 달려왔다. 시부모님이 30년 전부터 꾸준히 보수하면서 자주 찾찾았던 곳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충격이 크실 것 같아 아직 시부모님에겐 말도 못했다"고 했다. 박진호 기자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번진 불때문에 주민들은 대부분 맨몸으로 불타는 마을을 떠나야 했다. 강릉시 저동에 사는 김영삼(52)씨는 “오전 8시 30분쯤에 멀리 골프장 근처에서 연기가 보였다. 설마 여기까지 올까 싶었는데 30분만에 집 근처에 불길이 보여 가족들과 맨몸으로 대피했다. 집과 펜션 3개 건물이 다 불에 탔다”고 말했다. 안현동 주민 최내규(78)씨는 “불길이 집까지 번지는 걸 보고 빠져나오니 옆집은 이미 타고 있었다. 동네가 불바다다. 경황이 없어 집에 강아지도 두고 나왔는데, 손녀가 강아지를 왜 못구했냐고 눈물을 흘리니 너무 마음이 아프다”며 울먹였다.


“불에 탄 나무·상자 날아다녀… 차도 다 부숴졌다”


주민들은 강풍에 날리는 불씨, 연기와도 싸워야 했다. 경포동의 사무실에서 산불을 발견한 권모(23)씨는 “바람이 많이 불어서 불에 탄 나무들과 상자 등의 물건이 주변에 날아 다녔다”며 “근처에 주차해 둔 자동차도 유리가 깨지고 트렁크가 부숴졌다. 횡단보도 위 안내판도 바람 때문에 찌그러졌다”고 했다. 강릉시 저동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이모(44)씨는 “잠시 주문진에 외출했다 돌아오니 이미 불이 코앞까지 와서 아내와 친구들만 간신히 깨워서 대피했다”며 “대피하는 동안에도 불씨가 자꾸 날아와서 차가 폭발하지 않을까 공포에 떨었다. 연기 때문에 바로 앞차도 안보이고 비상등만 겨우 보였다. 30분을 달려서야 시야가 확보됐다. 펜션은 거의 전소 상태다”라고 말했다.
대형 산불이난 11일 오후, 강원 강릉시 일대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이날 산불은 바람을 타고 빠르게 인근으로 번졌다. 한때 화선이 8.8km에 달할 정도였다. 연합뉴스

불길이 번지는 방향에 있는 학교와 병원 등도 공포에 떨어야 했다. 안현동 경포대초등학교는 학생 71명과 병설 유치원 원생 11명이 에듀버스를 이용해 화재 발생지와 거리가 먼 초당초등학교로 대피했다. 이어 오전 10시쯤 모든 학생들을 학부모에게 인계했다. 김동원 경포대초 교장은 “오전 9시가 조금 안됐을 때 이미 서쪽 하늘에서 연기가 솟구치고 있었다”며 “바람이 너무 불고 연기와 불을 직접 보니 아이들이 무서워하고 울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 신영초와 연곡초, 사천중 등 강릉시 9개 학교가 단축수업을 했다. 교직원들은 학생들이 귀가한 뒤 학교 담장 등에 물을 뿌리며 불이 번지지 않도록 조치했다. 발화지점으로부터 약 1㎞ 떨어진 강릉율곡병원은 강풍에 외벽이 뜯겨나가는 피해를 입었다. 병원 관계자들은 안전을 위해 차량 진출입과 보행자 통행을 통제했다.

진화의 실마리는 이날 오후 2시 40분쯤 바람이 다소 잦아들며 찾아왔다. 운행기준인 20㎧ 아래로 풍속이 떨어지면서 헬기 3대가 투입됐다. 때맞춰 비도 내리기 시작했다. 소방관들 사이에선 “하늘이 돕는구나. 천만다행이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불은 오후 4시 30분쯤 완진됐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강릉=윤정민ㆍ이찬규, 장서윤 기자 yunj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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