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병원 꼭대기층 'VIP 신드롬'을 아십니까

류옥하다 2023. 4. 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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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에게 신경을 쓸수록 예후가 나빠지는 역설... 나만 특별하다는 생각, 오히려 치료 방해

이 글을 쓴 류옥하다 시민기자는 서울 대형병원에서 전공의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편집자말>

[류옥하다 기자]

병원(Hospital)과 호텔(Hotel). 지금은 전혀 다른 장소가 되었지만, 유래를 따라 올라가면 그 뿌리가 같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방인을 의미하는 'Hospes'에서 유래한 'Hospitāle'는 고대 로마부터 중세까지 빈민 구호소이자 순례자를 위한 숙소였다. hospitāle는 이방인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고, 그들이 아프면 성심껏 치료해 주는 일을 겸하는 병원이자 호텔이었다.
 
 <재벌집 막내아들> 같은 드라마에 종종 등장하는 'VIP(Very Important Person)실'
ⓒ JTBC
 
물론 이제는 호텔에서 CT를 찍거나 수술을 할 수 없고, 병원에서 룸서비스를 받거나 호캉스를 즐길 수는 없다. 그러나 현대 병원에도 아직 호텔 같은 곳이 한 곳 남아있다. <재벌집 막내아들> 같은 드라마에 종종 등장하는 'VIP(Very Important Person)실'이 바로 그곳이다.

병원에서 호텔 로비의 향기가

서울대병원, 세브란스병원, 성모병원, 삼성병원, 아산병원… 그 규모와 번쩍임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서울 종합병원의 꼭대기층이면 으레 VIP실이 있다. 병원마다 세부적인 구조는 다르지만, 그 짜임새나 운영 방식은 엇비슷하다.

처음 VIP실에 들어서게 된다면 냄새로 그 특별함을 먼저 알아차릴 것이다. 병원에 한 번이라도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특유의 소독약과 고름, 분변의 냄새를 잊지 못할 테지만, VIP실은 조금 다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은은한 커피 향과 고급 방향제의 향기가 우리를 맞이한다.

VIP실의 로비는 이곳이 흡사 오성급 호텔인가 하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바닥 소음을 막기 위해 호텔에서 사용하는 카펫 질감의 매트가 고급스러움을 더한다. 조명 또한 은은함을 주며, 휴지통마저 호텔 용품 같다.

출입 또한 철저하게 통제된다. 전용 출입증이 있어야 하고, 의료진도 아무나 출입할 수 없다. VIP들은 특히나 사생활에 민감하기 때문에 치료에 관한 기록도 보안이 철저하다. 격식에도 신경을 써서 드라마의 회장님들이 입원하는 곳처럼 병실 외에도 사랑방이 따로 있는 경우가 많다.

매일 수십에서 수백만 원에 달하는 병실료에 더해, 입원 요건도 까다롭다. 더러는 금전적 필요 조건에 더해 사회적 신용이 요구되기도 한다. 재벌 총수, 기업 임원, 정치인, 고위직 관료, 연예인들이 주된 환자들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코로나와 어깨 수술로 서울성모병원 VIP실을 드나들었고, 김대중 대통령은 신촌세브란스병원 VIP실에서 서거했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삼성서울병원 VIP실에서,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은 서울아산병원 VIP실에서 삶을 마감했다.

VIP 치료의 역설, 'VIP 신드롬'
 
 'VIP 신드롬'은 환자가 매우 중요한 사람이어서, 각별히 잘 봐주려고 할수록 예후가 좋지 않은 현상을 말한다.
ⓒ elements.envato
 
이런 VIP 환자를 대하는 일은 이제 막 첫걸음을 뗀 새내기 의료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기 마련이다. 초보 의사의 티를 막 벗은 동료들이 일반 병동에서는 잘하던 처치를 VIP실에서 손을 떨어 실패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접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두려움은 초보들만의 것이 아니다. 베테랑 의사들도 VIP를 대할 때 압박감을 느낀다. 의료계에는 이런 현상을 일컫는 용어도 존재한다. 바로 'VIP 신드롬'이다. 환자가 매우 중요한 사람이어서, 각별히 잘 봐주려고 할수록 예후가 좋지 않은 현상을 말한다.

왜 환자에게 신경을 쓸수록 예후가 나빠지는 역설이 생길까? 꼼꼼하게 치료하면 결과가 좋아져야 할 것이 아닌가. 명확한 연구 결과가 있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원인이 알려져 있다.

첫째는 환자의 의견에 맞서기 힘든 경우다. 환자가 비합리적 신념을 가졌을 때 일반적으로는 의사가 전문가적 소견을 제시하게 되지만, VIP의 의견은 쉽게 거부하기 힘들다. 당연히 환자의 예후도 좋지 못하다.

둘째는 법적인 책임에 대한 걱정이다. 의료도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아무리 철저해도 실수가 발생하고는 한다. VIP는 이런 잘못에 특히나 민감하고, 법적인 문제와 소송이 잦다. 당연히 이러한 압박은 의사의 운신의 폭을 좁힐 수밖에 없다.

셋째는 적극적 의료행위에 대한 두려움이다. 복강경(배에 작은 구멍을 뚫는 수술)에서 개복(배를 메스로 여는 수술)이 필요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일반적인 환자라면 즉시 개복을 시행할 것이다. 그러나 VIP 수술에서는 흉터에 대한 부담으로 개복을 미루게 되고, 최악의 상황에는 살릴 수 있었던 환자를 놓칠 수도 있다.

넷째는 치료가 산으로 가는 경우다. VIP에게는 대개 진료에 참여하는 의사가 여럿이다. 그렇게 모인 전문가들이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지만,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사공이 많아 산으로 가는' 일이 생긴다. 그렇게 되면 정작 질병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거나, 환자에게 과하게 약을 사용하게 될 수도 있다.

나만 특별하다는 생각...치료에 방해가 될 수도

누구에게나 스스로는 특별한 존재다. 특히나 아픈 이에게는 그가 가진 병이 세상의 전부처럼 생각되기 마련이다. 돈과 권력이 있다면 특별한 치료를 받고 싶은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VIP 신드롬'이 말해주듯, 자신이 중요한 사람임을 내세우는 것이 치료 결과를 좋게 만들지만은 않는다.

의사에게 모든 환자는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또는 신분'에 상관없이 VIP이다. 의사에게 환자의 생명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따라붙는 조건들은 도리어 치료에 방해가 될 뿐이다.

주위에서 유력 인사의 진료 중에 화려한 이력과 직함을 가진 명함을 받는 경우를 더러 들었다. 그러나 그런 이름표가 되레 의사에게 'VIP의 무게'를 지게 하는지도 모른다. 진정 쾌유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VIP'가 되려 하기보다는 의료진을 따뜻하게 대하고 치료 과정에 함께 참여하는 '좋은 환자'가 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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