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아들·딸 키운 집 산불에 빼앗겼다…최초목격자 "하도 기가 차서 덤덤"
“집이고 자동차고 다 타버렸어요. 하도 기가 차서 덤덤한 지경입니다.”
11일 오후 강원도 강릉 산불의 발화현장인 난곡동에서 만난 조모(69)씨는 완전히 타 버린 뒤에도 곳곳에 새빨간 불꽃이 꺼지지 않은 집 앞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였다. 그는 이번 산불의 최초 목격자다. 산림청은 발생초기 그의 집 난곡동 4번지를 발생장소라고 특정했다. 조씨는 아내를 대피시킨 뒤 끼니도 잊은 채 종일 불길과 사투를 벌였지만 날아든 불길이 집과 차를 모두 태우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의 얼굴과 두 손은 모두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조씨는 “오전 8시20분쯤 온 집안에 전기가 나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니 소나무가 쓰러져 전선에 걸쳐 있었고, 불꽃이 튀면서 전선 아래 고사리밭에 불이 붙어 금세 연기가 자욱했다”며 “삽과 갈고리를 들고 뛰어나가 불이 붙은 고사리밭을 갈아엎어봤지만 강풍에 불똥이 이리저리 날리며 번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조씨는 전기가 끊겨 단수된 상황에 지하수 관정이 있는 옆집에서 물을 길어다 집 곳곳에 들이부었지만, 발화점에서 불과 100여미터 떨어진 집에 불이 번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조씨는 “이웃 주민들에게 불이 났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119 신고를 해달라고 하고 이 집 저 집에서 물을 받아다가 집에 뿌렸는데, 바람이 워낙 셌다”며 고개를 떨궜다.
조씨가 아내와 함께 살던 집은 그가 13살이던 56년 전 부모와 함께 이사 온 단층집이었다. 작은 불티가 튀었을 뿐이지만 건조한 날씨에 강풍까지 겹친 상황에서 조씨 목조 단층집은 속절없이 타들어갔다. 결국 지붕까지 무너져 내렸다. 출가한 두 딸이 어릴 적부터 연주하던 피아노는 쇠로 된 줄과 틀만 남았다.
불이 난 지 6시간이 지난 오후 3시에도 조씨 집 곳곳에는 불꽃이 보였다. 조씨는 “이제 물을 길어올 곳도 없고, 다 타 버렸는데 불을 꺼서 뭐하나”라며 “신기하게도 집 뒤에 세워 둔 내 장비(굴착기)에만 불이 안 붙었다”고 했다.
수십년 째 마을을 지켜온 조씨의 이웃들도 조씨와 비슷한 처지가 됐다. 마을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조상 대대로 살던 고향 집으로 귀향한 조영중(75)씨는 “집안 대대로 몇백년을 이 동네에서 살다 정년하고 나 혼자 집 지킨다는 생각으로 낙향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냐”며 “우리 집은 창고만 불탔지만, 집 전체가 타 버린 사람들은 어쩌나”라고 울음을 삼켰다.
발화점 인근 농작물 피해도 심각했다. 집 지붕에 불티가 날아들어 피해를 본 심엄섭(65)씨는“비탈에 키우던 명이나물이 까맣게 타버렸고, 키위나무도 연기를 4시간 이상 쐐서 쓴 키위가 열리기나 할지 모르겠다”며 “열매가 푸릇푸릇하게 맺혀도 나무가 한 번 연기를 먹으면 상품 가치 없는 열매만 맺는다는데, 평생 농사를 망쳤다”고 했다.
강릉=손성배ㆍ김민정 기자 son.sungb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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