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삼킨 산불 이번에도…"한순간에 문화재 소실, 황망해"
2005년 4월 강원도 양양의 천년고찰 낙산사를 집어삼켰던 산불은 이번에도 강릉의 문화재들을 위협했다. 11일 오전 불길이 문화재가 밀집한 경포호 인근으로 번질 기미를 보이자 문화재청과 소방당국은 문화재 사수 작전에 돌입했지만, 강원도 지정 문화재 방해정(放海亭)과 1886년 지어진 정자인 상영정(觴詠亭)은 화마를 피하지 못했다. 상영정은 전소됐고, 방해정은 곳곳이 소실됐다.
이날 방해정 앞에서 만난 이승희(63)씨는 “아직 시부모님한테 얘기를 못 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씨는 방해정 주인 박연수씨의 며느리다. 그는 불에 그슬린 건물 곳곳을 어루만지면서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문은 망가졌고 불길이 바닥과 천장으로 향하면서 마루 곳곳은 파편으로 아수라장이 됐다. 이씨는 “시부모님이 아끼던 곳이라 30년 전부터 꾸준히 보수하면서 소중하게 관리했는데 한순간에 이렇게 돼 황망하다”며 고개를 떨궜다.
문화재청의 문화재 사수 작전은 보물 제2046호 ‘경포대(鏡浦臺)’ 등에 집중됐다. 경포대는 경포호 인근 언덕 위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5칸의 정자로 고려 시대 김극기의 시 ‘경포대’부터 조선 시대 송강 정철의 ‘관동팔경’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인과 문인들이 찾아 글을 남긴 명소다. 산불이 경포대를 위협하자 문화재청은 이날 오전 경포대 현판 7개를 떼어내 인근에 있는 오죽헌박물관으로 옮겼고 소방당국은 화재 예방을 위해 경포대 곳곳에 물을 뿌렸다.
예방을 위한 살수 작업은 경포대에서 차로 5분 거리인 선교장에서도 이어졌다. 국가민속문화재인 선교장은 조선 후기 전형적인 상류 주택으로 가장 오래된 전통가옥 중 하나다. 불길은 경포호 연안 사초지와 경포대 주변 수목을 태웠지만, 경포대와 선교장은 무사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조기 대응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강풍을 타고 번지는 불길 때문에 문화재 피해를 완전히 막기엔 역부족이었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의 발 빠른 대응은 2005년의 악몽의 재연을 막겠다는 의지가 작용한 결과다. 지난 2005년 4월 4일 등산객의 실화로 발생한 강원도 양양 산불은 이튿날 보물 479호 낙산사를 덮쳐 사찰이 전소됐다. 동종을 포함해 보물 3점이 소실됐고 목조 홍예문(虹霓門·시도유형문화재 33호)은 밑부분인 석축 기단만 남았다. 낙산사를 둘러싸고 있던 아름드리 해송 숲도 재가 됐다. 주변 산림을 복구하는 데에는 3년 이상의 시간과 189억원의 예산이 소요됐다. 낙산사 복원은 2011년 마무리됐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낙산사 화재는 악몽과 같았다. 낙산사 소실 후 화재 시 문화재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조기 대응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고해졌다”며 “숭례문 화재 이후론 24시간 대응반도 만들어 가동 중”이라고 말했다.
강릉=심석용· 박진호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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