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배상의 핵심은 변제가 아니라 자기결정권이다 [소셜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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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원]
▲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가 3월 1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104주년 3.1절 - 윤석열 굴욕외교 한일합의 중단! 일본 식민지배 사죄배상 촉구! 범국민대회’에서 규탄 발언하고 있다. |
ⓒ 권우성 |
윤석열 정부의 '일제 강제동원 제3자 변제안'은 피해자는 물론 국민 모두에게 깊은 모멸감을 안겼다. 변제안이 발표된 직후 매일같이 각계각층의 시국선언과 규탄시위가 이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시국선언이 예고된 상황이다. 그럼에도 윤석열 정부는 국내에서 기부금을 모아 "보상"하는 것이 "현실적 해결책"이라면서, "미래지향적 관계를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고 정신 승리를 하고 있다.
오랜 시간의 고통에도 힘겹게 소송을 이어온 피해 당사자들의 한스러움이 뼈에 사무친다. 양금덕 할머니는 꼿꼿한 목소리로 "그런 돈은 굶어 죽어도 안 받아요"라고 선언하고, 한일 정상이 만난 당일 다른 피해 유족과 함께 새로운 소송을 제기했다. 한국 국적 법인이 지주회사인 미쓰비시에 송금하려던 7700만 원이 2021년 압류된 상태인데, 이 금액을 추심해달라는 것이다.
배상을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강제동원은 없었다"며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을 상대로, 이처럼 피해자들은 직접 발로 뛰며 어떻게든 정의를 실현하고자 노력해왔다. 미쓰비시의 국내 자산을 찾아 특허권과 상표권을 압류한 것도 그 노력 중 하나다.
그러나 대법원은 정부의 눈치를 보며 강제 매각 결정을 미루고 있다. 심지어 이제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 가해자의 사과도, 배상도, 역사적 진실의 인정도 모두 "대승적으로" 필요없다고 한다.
정부가 역사 왜곡에 눈감고 가해에 공모하는 이 현실은 단순한 외교 참사가 아니다. 2023년인 지금도 식민 역사가 지속되고 있으며 우리가 지배-종속 관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음을 뜻한다. 진정한 피해 배상은 그저 자의적으로 정한 "적정 수준의 금액"을 변제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물며 피해 국가가 피해자 자신에게 스스로 배상하는 '제3자 변제안'은 반인권적이고 반역사적이며, 동시에 피해자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가해를 더하는 것과 같다. 이런 변제를 통해서는 결코 그 어떤 배상도, 회복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피해 배상은 변제가 아니라, 피해자들과 피해 국가의 자기결정권을 회복시키는 수준으로 분배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정부가 앞장서 면죄와 화해를 강요하는 대한민국과 달리, 가슴 아픈 식민 역사를 갖고 있는 다른 국가들은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 평화나비네트워크 이화여자대학교 지부 대학생들이 7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파빌리온 앞에서 강제동원 해법안 철회를 위한 릴레이 학내 수요시위를 열고 정부의 졸속적인 강제동원 해법안을 규탄했다. |
ⓒ 유성호 |
따라서 배상이 지연되면 그만큼 더 큰 책임이 따를 수밖에 없다. 심지어 개인 간의 송사에서도 배상을 이유 없이 지연시키면 지연 이자를 물어야 하지 않는가?
또한 흑인 노예제에 대한 배상, 즉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강제 동원되어 노역에 시달렸던 흑인들의 피해 배상을 위해 싸우고 있는 미국 변호사 니키치 타이파는 미 정부의 공식적, 무조건적인 사과와 함께 "피해자들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정책 수립과 실천"을 요구해왔다.
그 요구는 피해자들의 회복에 필요한 경제, 교육, 의료, 문화 등 다양한 정책 영역 전반에 걸쳐있으며, 심지어 미국을 떠나 이주할 수 있는 자유까지도 포함한다. 원치 않는 동원의 과거로부터 자기 삶의 결정권을 되찾는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주장은 미 하원에서도 진지하게 논의되어 왔는데, 이는 온전한 탈식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식민의 역사가 한 세기이든, 한 세대이든, 그 광범위한 종속의 상처로부터 치유되기 위해서는 가해자들의 배상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지금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에 요구하고 있는 것은 그저 최소한의 인륜적 책임이다. 이것마저도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과거와 "화해"하고 탈식민을 이룩할 것인가? 우리는 이미 끝난 얘기를 다시 물고 늘어지는 것이 아니며, 이미 배상을 받았는데 또 배상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의 노력이 늦어진 탓에 수많은 피해자들이 한을 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으며, 남겨진 피해자들의 아픔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는 여전히 배상도, 명예 회복도, 역사적 진실의 국제적 확립도 쟁취해내지 못했다. 윤석열 정부가 "일본의 호응"을 얻어오겠다며 사법주권을 포기한 결과, 대한민국이 과연 무엇을 얻었는가? 정부는 미국과 일본의 들러리가 되면서 마치 한 계단 올라선 것처럼 자화자찬하고 있다. 그럴 때가 아니다.
▲ 김정희원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소셜 코리아 운영위원) |
ⓒ 김정희원 |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김정희원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소셜 코리아> 운영위원입니다. 권력, 정의, 불평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조직 이론 및 조직 행동론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최근 <공정 이후의 세계>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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