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정책적으로 변호사 활동을 억압한 이유
[김종성 기자]
3월 31일부터 방영 중인 MBC <조선 변호사>에 조선시대판 변호사가 등장한다. 외지부(外知部)로 불리는 존재가 바로 그들이다.
드라마 속의 외지부인 강한수(우도환 분)은 오늘날의 변호사와 거의 비슷하다. 외지부를 탐탁치 않아 하는 관원들을 속이고자 의뢰인의 친인척을 가장하는 일이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지금의 변호사와 다를 게 없다. 방청객들이 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의뢰인 옆에서 변론하고 입증하는 모습은 현대의 변호사를 연상시킨다.
이 드라마 제2회에는 명나라 관리가 등장하고 명(明)이 적힌 깃발이 선박에 게양된 장면이 있었다. 이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이 조선 전기임을 보여주는 장치다.
▲ MBC 사극 <조선 변호사> 한 장면. |
ⓒ MBC |
그런데 <조선 변호사>에 나오는 외지부는 조선 전기에는 만나기 힘들었다. 소송대리인의 존재가 합법화된 것은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이듬해인 1895년이다. 양력으로 1895년 4월 29일 반포된 법부령 제3호 민형소송규정에서 합법적인 소송대리인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
1970년에 국회도서관이 펴낸 <한말 근대 법령자료집> 제1권에 수록된 민형소송규정 제3조는 "소송인은 자기가 하믈 득(得)지 못하난 경우에난 재판소의 허가랄 득한 후 기(其) 소송을 대인(代人)에게 위탁하난 사(事)랄 부(付)하미 득(得)홈"이라고 규정했다.
이렇게 제3조는 자기가 직접 소송할 수 없는 경우에는 재판소의 허가를 얻은 후에 그 소송을 위탁하는 일을 대인에게 부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 뒤, 단서에서 "단, 대인에게는 위임장을 교부하미 가(可)홈"이라고 규정했다.
대인은 완전한 의미의 변호사는 아니었다. 변호사로 볼 수도 있고 법무사로 볼 수도 있었다. 현대적 의미의 변호사 제도는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이 있었던 1905년부터 시행됐다.
이처럼 조선왕조 막판에 등장한 변호사가 조선 전기를 배경으로 하는 이 드라마에 등장했다. 그래서 이 드라마 속의 외지부를 볼 때는 픽션이 크게 가미돼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외지부라는 명칭의 기원은 음력으로 태종 5년 1월 15일자(양력 1405년 2월 14일자) <태종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노비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 도관(都官)에서 재판을 맡은 관리가 지부(知部)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지(知)는 옛날에는 '알다'뿐 아니라 '관장하다, 다스리다'의 의미로도 많이 쓰였다. 이 같은 용례는 오늘날의 도지사 같은 단어에도 남아 있다. 이 글자가 들어간 지부가 노비 소송의 법관으로 활동했다.
그런 법관처럼 법률을 다루는 일을 관청 바깥에서 한다고 해서 외지부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관청 외부에서 법률 조문을 운운하며 의뢰인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불렸던 것이다.
외지부는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인이라는 점에서는 변호사와 비슷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활동 양상은 변호사와 차이가 있었다.
이들의 구체적인 활동 방식과 관련해 2016년에 <명청사연구> 제46집에 실린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논문 '조선시대 소송제도와 외지부의 활동'은 "기본적으로 외지부는 각종 소송을 사주하고 권장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존재였다", "외지부는 소송의 사주에 그치지 않고 소장을 대신 작성하거나 심지어 증거문서의 위조까지도 감행하였다"라고 설명한다.
▲ MBC 사극 <조선 변호사> 한 장면. |
ⓒ MBC |
이처럼 외지부는 소송을 하도록 부추기거나 소송서류를 작성해주기도 하고, 브로커처럼 관리들과 접촉해 상황을 유리하게 바꾸기도 했다. 그리고 예외적인 경우에는 소송을 대신 수행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변호사와 달리 이들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소송을 대리했다.
<경국대전> 형전에 따르면, 다른 사람을 부추겨 소송을 하도록 하면 장형 100대와 도형(徒刑) 3년에 처해졌다. 곤장 100대와 노동형 3년을 선고받게 되면, 노동형을 받기 전에 곤장 100대만 맞고도 죽을 수 있었다. 살살 때리지 않는 한, 곤장 100대는 사실상 사형이었다. 이는 이들의 업무가 목숨을 걸 수도 있는 일이었음을 의미한다.
1895년 민형소송규정에서는 소송 대리가 허용됐지만, 위와 같이 그 전만 해도 소송 대리는 원칙상 위법이었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다. 형전의 또 다른 조문은 "사족(士族)의 부녀에게는 아들·손자·사위·조카·노비 중에서 대신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고 규정했다.
집밖 외출이나 인적 사항의 노출이 제약된 사대부 여성의 경우에는 소송 대리가 예외적으로 허용됐다. 이런 조문을 활용해 사대부 가문의 소송을 이 집안 여성의 이름으로 수행하고 이들의 조카나 노비로 위장하면, 외지부가 소송대리를 하는 게 가능했다.
위 조문에 언급된 것처럼, 주인집의 법률 사무를 처리하는 노비들도 있었다. 소작농을 포함한 노비 숫자가 몇 천 명인 가문에서 이런 일을 하는 노비는 오늘날의 기업 법무팀 직원과 유사했다.
이처럼 예외가 인정되기는 했지만, 타인의 소송 대리는 원칙상 금지됐다. 그래서 외지부는 조선시대 내내 배척의 대상이 됐다.
배척 대상이 된 외지부
왕조 입장에서 보면, 법률은 대중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였다. 관리도 아니면서 법률을 활용해 돈을 버는 외지부의 존재는 왕조 입장에서는 불편한 존재였다. 이들이 법망을 빠져나가는 지식을 대중에게 알려줬으니 더욱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관리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외지부들이 민원인들을 부추겨 소송을 일으키면 관리들의 업무 부담이 자연히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관청에 근무하는 하급 서리 상당수는 관에 얽매인 공노비들이었다. 전체 관리들에게 녹봉을 줄 여력이 없었던 고대 왕조들은 관노비들을 무보수 행정 인력으로 활용했다. 이런 노비들은 비번을 이용해 돈을 벌거나 아니면 직무를 이용해 뇌물을 챙겨야 했다. 옛날 관청의 문지기들이 민원인들에게 손을 내미는 일이 많았던 것은 이들이 무보수로 근무했기 때문이다.
이런 서리들이 볼 때도 소송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관청 일을 적당히 하고 돈벌이에 매진해야 할 이들의 입장에서는 소송 업무를 가중시키는 외지부들이 반가울 리 없었다.
그런 이해관계들이 맞물려, 조선왕조는 외지부를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성종 5년 2월 7일(1474년 2월 22일)에 있은 성종과 신하들의 경연 자리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이 날짜 <성종실록>에 따르면, 임금에 대한 직언을 담당하는 사간원의 정6품 정언(正言)인 안침은 임금과의 세미나 자리에서 "앞서 외지부로 불리는 자들을 모두 변방으로 옮겼으니, 지금 이 예에 따라 소를 도살하는 자들을 모두 찾아내 변방으로 옮기십시오"라고 건의했다.
한성부(속칭 한양)에서 활동하는 외지부들을 변방으로 추방한 선례가 있음을 보여주는 발언이다. 눈앞의 외지부들이 불편해 이들을 변방으로 쫓아내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조치가 외지부들을 근절시키지는 못했다. 소송 절차가 문서주의에 입각했기 때문에 서류를 제대로 제출하지 못하면 소송에서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글을 잘 쓰거나 법을 잘 아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소송에서 이기기 힘들었다. 법망을 피해 활동하는 외지부들은 이 때문에 사라지지 않았고, 왕조 운영자들은 이들로 인해 오백년 내내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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