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혁신운동'에 나선 이 사람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선양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의 그림자로 남은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인물들이 많습니다. 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 1894~1968)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평남도청 투탄 의거·이승만 탄핵 주도·프랑스 영사 암살 시도·중앙청 할복 의거 등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문일민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문일민이라는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기 위해 <무강 문일민 평전>을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김경준 기자]
충칭 임시정부의 혁신운동에 나서다
해방 직전인 1945년 4월 충칭 임시정부에서 제38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렸다. 문일민이 속한 신한민주당(신민당)은 민족혁명당(민혁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한 상태였다.
신민당은 독립운동자대표대회 소집 및 임시정부의 확대 개조를 관철하기 위해 임시정부의 기간 정당인 한국독립당(한독당)을 상대로 치열한 대여투쟁을 전개했다.
신민당 손두환은 '충칭 임시정부를 확대 개조해 유일무이한 정부의 위치로 굳히지 않는다면, 다른 지방에 정부들이 난립하여 혼란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며 '해외의 모든 독립운동가들을 포괄하는 확대 개조'를 요구했다. 흥미로운 것은 충칭의 독립운동가들이 미국·소련·화북 등지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국무위원직을 양보하고 남는 자리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한독당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라는 요구였다. 당연히 동의할 수 없었던 한독당은 5월 7일 민혁당과 협의 끝에 신민당을 배제한 채 임시정부를 주체로 하는 '독립운동자대표대회 소집안'을 긴급 상정했다.
이는 독립운동자대표대회의 구성·범위·소집 질서 등 소집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임시정부가 갖겠다는 것으로 신민당이 제안한 원안의 취지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었다. 요컨대 한독당은 한독당 중심의 확대 개조를 추진함으로써 자신들의 기득권은 끝까지 놓지 않겠다고 선언한 셈이었다.
그런데 '소집안'에 삽입된 '(독립운동자대표대회를) 가장 빠른 기간에 소집'한다는 구절 역시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에 대해 한독당 측 박찬익이 "기한은 내년(1946년-인용자 주) 4월 11일 이전"으로 하자고 주장하자 문일민은 "내년에 여기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적어도 한 3개월하고 작정하고 나가야지 만일 그렇게 하자는 것은 하지 말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여 기한을 확정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독립운동자대표대회를 열 것을 요구했다.
▲ 제34회 임시의정원 의원 일동(1942.10.25). 가운데가 문일민 |
ⓒ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
충칭에서 맞이한 해방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꿈에 그리던 해방이 찾아왔다. 그러나 일제의 갑작스러운 항복 선언으로 맞이한 '준비되지 않은 해방'은 임시정부가 넘어야 할 또다른 산이었다.
해방 직후인 8월 17일 개원한 제39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임시정부의 입국 문제와 새 정부 수립 문제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때 문일민 등 신민당 의원들은 국무위원 총사퇴 후 과도내각(看守內閣) 조직을 주장했다.
앞서 이들은 해방이 확실시되자 "대한민국의 주권을 27년 이래 임시정부 소재지에 거주하는 독립운동자만이 행사해 온 것은 과거의 정세 아래 있어서도 부당한 일이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면서 "왜구의 무조건 투항으로 인하야 우리의 조국이 해방되게 된 이때에 있어서는 임시정부 소재지에 거주하는 독립운동자만이 독점하는 소위 대표제를 더 존속시킬 필요도 가능도 없었다"라고 해 임시의정원의 권한을 정지하고 장차 성립될 '전국 통일적 임시의회'에 그 권한을 봉환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전국 인민의 의지에 의한 전국 통일적 임시정부가 국내에서 건립될 것은 명백하다. 충칭 임시정부가 전국 통일적 임시정부로 자처하며 인민들의 의지 위에 군림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국내 인민이 자기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정부와 그 인물을 선택하는 데 지장이 될 것은 명백한 일이므로 임시정부의 정권을 국내 인민들에게 봉환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임시정부에 대한 파괴행위로 인식한 한독당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신민당의 제안은 다시 한 번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8월 23일 부로 임시의정원이 무기 휴회함으로써 임시정부의 입국 및 입국 후 정국 수습방안은 한독당이 이끄는 국무위원회 중심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해방 전후로 문일민은 충칭 임시정부·임시의정원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한독당 중심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임시정부의 확대 개조 등 끊임없이 혁신을 추구했던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 1945년 11월 3일 환국을 앞두고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기념 촬영하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모습 (빨간 원이 문일민) |
ⓒ 외교부 외교사료관 |
오늘(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4주년이다.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임시정부 사적지(임정로드) 답사·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 등 임시정부를 기억하기 위한 노력들이 활발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임시정부에 대한 기억은 반쪽에 불과하다는 아쉬움이 든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개관 소식을 접하자마자 바로 임시정부기념관으로 달려가 전시를 꼼꼼하게 관람한 바 있다.
▲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 전시 중인 '정당 계보도'. 해방 전후 임시의정원에서 활약한 군소정당들은 생략되어 있다. |
ⓒ 김경준 |
그러나 문일민 등이 참여했던 신한민주당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임시의정원에서 또 다른 목소리를 냈던 군소정당들은 그 자체로 임시의정원이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갖고 있으면서 의회민주주의가 활발히 작동하는 공간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이를 이야기하지 않고서 과연 임시정부를 온전히, 제대로 기억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특히나 거대 양당 독식체제로 굳어진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임시정부의 군소정당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결코 작지 않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기억하고 계승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 20부에서 계속 -
[주요 참고문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5, 국사편찬위원회, 2009
<자료한국독립운동>2,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2
<한국독립운동사 자료>1, 국사편찬위원회, 1970
구익균, <새 역사의 여명에 서서>, 일월서각, 1994
박순섭, <광복 직전 新韓民主黨의 臨時議政院 활동과 정국구상>, 《역사연구》 30, 역사학연구소, 2016
배경식, <'反韓獨黨勢力'의 重慶臨時政府改造運動과 解放後 過渡政權 樹立構想>, 성균관대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6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중국과 손잡는 나라들, 미국만 쳐다보는 한국
- "사과합니다"... '가디언' 헤드라인이 준 충격
- 정의구현사제단 첫 전국 시국미사 "윤 대통령의 국민은 누구인가"
- <중앙>이 삭제한 여순사건 원고... 나는 왜 '연재 망명'을 택했나
- [박순찬의 장도리 카툰] 퍼주고 털려도
- 밥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꼭 참아야 하는 것
- 정경심 접견 변호인 "치료 시급, 정치 빼고 인도적 차원만 봐달라"
- "대통령실 도청, 미국만 했을까?" 김병기의 뼈있는 지적
- 경찰 머리채 잡은 주폭 예비검사... "검사 임용되지 않을 것"
- 국가안보실 도청 파문과 미국의 속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