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에 선 직폭]⑤'일하는여성' 지우는 젠더폭력… "'동료' 인식부터"
여성 직원들에게 성희롱을 일삼다가 해고된 모 공단 A과장. 그는 여직원들에게 불쾌한 성적 발언들과 더불어 선정적인 영상과 사진을 보여주고, 퇴근 후 이유 없이 전화를 걸거나, 카카오톡 프로필을 뒤져 과거 사진에 관해 물었다. 그는 해고에 문제가 없다고 본 중앙노동위원회 판정의 효력을 다투는 소송을 냈지만 2021년 4월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는 "직장 동료 사이의 단순한 농담이나 자연스러운 대화로 보기 어렵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설령 성적인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이뤄진 행위들은 일반인에게 충분히 성적 혐오감을 느끼게 한다"라며 "회사는 비위 행위 엄단을 통해 재발을 막고, 직장 내 근무 질서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일터에서 여성 직원들이 겪는 '젠더폭력'은 대표적인 직장 내 괴롭힘 유형으로 꼽힌다. 지난해 10월 직장갑질119가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23.1%가 직장에서 일상적 젠더폭력·차별로 '외모 지적'을 당했다고 응답했다. 외모 지적을 경험한 비율은 여성(36.3%)이 남성(13.2%)보다 약 3배 많았다. 여성 응답자 30.9%는 "성별 고정관념에 따른 허드렛일 차별을 겪었다"고 답했고, 14.9%는 "'원치 않는 구애'를 받았다"고 했다.
지난 2월 수원지법 민사15부는 부하 직원에게 거듭 구애를 한 B씨에 대해 "해고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본부장이던 유부남 B씨는 팀 내 미혼 여직원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하고도 구애를 멈추지 않았다. 극단적 선택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거부 의사를 명확하게 밝혔지만 B 씨는 사적인 감정을 업무에 반영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구애 행위 상당수는 사내 업무용 메신저 프로그램으로 이뤄졌다"며 "이는 피해자에게 성적 혐오감을 일으켰고,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서는 정신적 고통을 주고 근무환경을 악화시켰다"고 지적했다.
젠더폭력은 강력범죄로 이어지기도 한다. 자신이 직장에서 스토킹하던 신당역 역무원의 신고로 형사 처벌 위기에 놓이자 보복살해 범행을 저지른 전주환(31)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지난 1월 전주환의 형사 재판에서 검사는 "피해자는 늘 출근하던 직장에 나타난 피고인에 의해 갑작스럽게 공포감을 느끼며 사망했다"며 "사법시스템을 믿고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는 국민에게 언제든 이 같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를 줬다"고 강조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여성 근로자는 직장에서 가해자보다 취약한 위치인 경우가 많아 괴롭힘의 대상이 되기 쉽다. 직장에서 스토킹과 성폭력을 당하더라도,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문제를 올바로 해결하는 회사는 아직 많지 않다"며 "결혼과 출산, 육아 과정으로 승진이 불리해지는 등 이미 다양한 장벽을 마주한 피해자는 괴롭힘을 당해도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혜미 수원지법 판사는 논문 '직장 내 성희롱에 관한 사용자의 책임'에서 "최근 판례는 업무시간이 아닌 때, 업무 장소가 아닌 곳에서 이뤄진 성희롱에 대해서도 사용자 책임을 인정한다. 피해자를 도와준 조력자에 대한 불이익 조치도 불법"이라며 "직장 내 성희롱은 사회구조 및 조직문화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사용자의 역할과 책임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성희롱 피해 근로자는 가해자 또는 사업주(사용자)를 상대로 손해배상 등 민법상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남녀고용평등법도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사업주의 징계 의무 등을 담고 있다. 모 공사에서 인턴으로 근무한 20대 근로자가 50대 상급자로부터 강제추행을 당한 사건과 관련, 2021년 8월 서울중앙지법은 가해 직원과 이들에 대한 관리직 직원, 공사가 합계 4500만원을 피해자에게 지급하도록 했다. 성폭력 사건을 사실상 방치한 사측의 책임을 함께 물은 것이다.
김 소장은 "결국 직장 내 '성차별적 문화'가 문제의 원인이다. 상대가 일하려고 만난 동료라는 점을 인식하고, 일을 통해 관계를 쌓아가면서 서로 안전한 거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사회의 성차별 문화가 사무실까지 고스란히 이어지기 때문"이라며 "괴롭힘 행위가 조직 내에서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는 단호한 지침을 실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세정 돌꽃노동법률사무소 노무사는 "외모에 대한 평가나 지적, 통제는 직장 내 괴롭힘이자 성희롱이고 명백한 차별이다. 조사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은 다양한 유형의 젠더폭력이 존재할 수 있다"며 "직장 내 괴롭힘 관련 매뉴얼에 성차별적 괴롭힘 문제를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담아야 한다"고 밝혔다.
김대현 기자 kd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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