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캐릭터탐구㉟] 브레이킹 배드 월터 VS 제시 ➀이성적 ‘화이트’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즌 5까지, 총 62화의 길이라니. 세계적 인기 드라마라는 수식어만으로는 ‘브레이킹 배드’가 당기지 않았다.
계기가 있었다. 우선, 보도된 바와 같이 한국에서 리메이크된단다. 세계 제일의 OTT(Over The Top, 인터넷TV)에서, 또 지상파에서 방송이 된다고 하니 미리 봐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그대 어이가리’로 해외영화제에서 50관왕, ‘에덴의 남쪽’으로 벌써 7개의 트로피를 받은 이창열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는 점도 흥미를 돋웠다. 기본이 선 감독은 영화냐 드라마냐, 예술영화냐 장르영화냐, 구애받지 않는다.
오랜만에 재미있게 본 영화 ‘대외비’도 자극제가 됐다. 선거 소재 영화 ‘대외비’와 마약 소재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 간극이 커 보이지만, 공통점도 크다. 주인공들이 모두 악화해 간다. 주인공이 모두 악인이거나 악인이 되어가는 인물이고, 작품이 그들의 악행을 지지하거나 비판하는 태도 없이 현 사회나 인간 도덕을 풍자하는 과정에서 인물들을 개성적으로 살려내는 ‘피카레스크’ 구조다. 15~16세기 스페인에서 유행했다는 피카레스크 장르의 소설처럼,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인물이 악화해 가는 서사로 긴장미를 심화한다.
시류도 한몫했다. 드라마 ‘더 글로리’로 학교폭력 관련 사건들이 부각한 것과 반대로, 유명인들의 자제와 스타 배우의 연이은 마약 사건으로 마약이 얼마나 우리 코끝까지 왔는지 실감하게 됐다. 우리는 이제 농담으로도 ‘마약청정국’이라는 말을 쓰기 어렵게 됐고, 더 이상 마약 소재 드라마를 남의 나라 얘기인 듯 ‘바다 건너 불구경’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봤다. 초반에는 ‘나도 시한부 선고를 받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까’ ‘생의 마지막을 스스로 망가뜨리고 싶을까’ 등의 삶과 죽음에 관한 질문 속에서 시청했다. 그다음엔 마치 맥가이버처럼 뭐든지 해내는 고등학교 화학선생님 출신의 마약제조자 월터의 ‘문제해결력’에 재미를 느끼며 달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스스로 깜짝 놀랐다. ‘가족을 위해서라는’ 대전제를 핑계 삼아 악행을 일삼는 월터를, 응원하고 있다. 마약도 하고 마약도 만들고 시시껄렁하게 사고를 치는 제시를, 비난하기보다 여린 감수성을 동정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월터와 제시를 어떤 인물로 보았기에, 그들의 역사성을 어떻게 이해했기에. 그들에게서 나와 우리 사회의 어떤 공통점을 보았기에 측은지심을 보내게 됐을까.
먼저, 월터 화이트(브라이언 크랜스톤 분)는 노벨화학상을 받은 연구에 공헌했을 만큼 뛰어난 화학자였다. 합이 잘 맞는 연구 동료였고 연인이었던 그레첸과의 사이가 틀어지고, 무너진 자존심에 겨우 5천 달러를 받고 스스로 이름도 지은 기업 ‘그레이 메터’를 뛰쳐나왔다. 미국 최고 대학 박사 출신의 그가 미국 뉴멕시코주 작은 도시의 화학 교사로 사는 사이, 그레첸은 또 다른 창립 멤버 엘리엇과 결혼했고 ‘그레이 메터’는 자산가치가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세계적 기업이 됐다.
드라마에서도 불명확하게 표현된 그레첸과의 결별 이유 또는 결과를 두고 ‘무너진 자존심’이라고 얘기한 이유가 있다. 월터에게는 자존심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월터는 그레첸처럼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엘리엇에게 느끼는 열등감 정도는 얼마든지 극복했다, 화학자로서 자신은 훨씬 유능하고 뛰어났으니까. 그런데 그레첸과 엘리엇의 문화적 성향이 잘 어우러진다고 느꼈을 때, 월터는 그레첸의 자신을 향한 연심이 변한 것인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아니 확인하기엔 자존심이 상해서, 제멋대로 연인 관계도 끝내고 동업자 관계도 끊고 혼자 떠나버렸다.
상심한 그레첸을 위로하며 엘리엇과 이제 가까워졌을 테지만, 월터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둘이 결혼한 것으로 자신의 ‘따돌림’ 가설은 입증된 것이다. 스스로 떠났으면 거기서 모든 걸 단절했으면 좋았을 텐데 월터에게는 회복하기 힘든, 자존심에 새겨진 크나큰 상처로 남았다. ‘그레이 메터’가 성장하고 두 원수가 부자가 될수록 상처는 덧났을 것이다.
그런데, 암까지 걸렸다.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는데, 폐암 말기다. 국민건강보험이 없는 미국에서 교사 월급으로 든 민간보험으로는 제대로 된 치료도 받을 수 없다. 죽는 날 받아놓은 산 송장이 됐다. 상처 난 ‘자존심에게는’ 이제 분출구가 필요하다. 월터 화이트는 세상 누구보다 잘났고, 모든 걸 통제할 수 있고, 그것으로 남은 가족이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보여줘야 눈을 감을 수 있다. 그것이 비록 불법 중의 불법, 무법 중의 무법인 ‘마약제조’라 해도 말이다.
마침내 월터는 하이젠버그라는 가명으로 역사상 최고 순도의 메스암페타민을 탄생시킨다. 색깔도 특별하다, 푸른 빛이다. 1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여 포 떼고 차 떼고 온갖 비용과 손실을 제하고도 수중에 8700만 달러가 남는다. 그대로 승리인 듯싶지만, 드라마는 폭주를 멈추지 않는다.
돈도 잃고 가족도 잃고 결국 암이 아니라 폭력으로 목숨을 잃게 될 상황, 진정 인생 벼랑 끝에 몰려서야 월터는 인정한다. 자신이 그토록 마약제조에 매달렸던 걸 가족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였다고. 월터 화이트에게 만족감의 원천 ‘자존심’은 자신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요 생명이다. 아무리 사람이 변했어도 이런 악마 같은 일까지 저지를 수 있나, 의문이 들었던 악행들의 바탕에는 내 자존심을 건드린 자들에 대한 응징과 내가 모든 걸 통제하는 ‘상황의 주인’이라는 자의식이 있던 것이다.
이런 식의 자기합리화가 가능한 것은, 자기합리화의 늪에 빠져 ‘브레이크 없는’ 악화 일로를 걸을 수 있는 것은 월터가 매우 이성적이기 때문이다. 혹은 자신은 완벽히 이성적 인간이라고 믿는 자의식에서 기인한다. 월터는 제시가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일말의 이성도 없는’ 벌레 취급하고, ‘생각 좀 하고 행동하라’는 말을 밥 먹듯 한다.
어떤 문제가 터지면 마치 세계 최고의 외교관이라도 된 양 ‘만나서 이성적으로 설득해 보겠다’고 말하고, 자신의 언변이면 누구의 마음이든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월터가 보기에 세상의 일들이 꼬여가는 건 도무지 사람들이 이성적이지가 않아서다.
[홍종선의 캐릭터탐구㉟] 브레이킹 배드 월터와 제시 ➁감성적 ‘핑크맨’…로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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