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美 금리인상 1년, 갈림길에 선 파월
기준금리 0.25%→5.0%로 인상
물가 6%대 낮췄지만 인플레 불씨 여전
고강도 긴축에 SVB 파산發 은행 위기 번져
각국 중앙은행은 디커플링 시작
미국이 고강도 긴축 기조를 시작한지 1년이 지났다. 미 연방준비제도(Fed)는 지난해 3월을 시작으로 1년 간 총 9차례에 걸쳐 금리를 인상해 0.25%였던 기준금리를 5.0%까지 끌어올렸다. 1980년대 오일쇼크에 맞먹는 인플레이션을 낮추려는 목적이었다.
릴레이 금리인상의 상흔은 컸다. Fed의 금리인상에 주요국이 보조를 맞추면서 전 세계 가계·기업의 이자부담이 가중됐다. 시장에서는 자금이 말랐고,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의 파산으로 시작한 위기는 스위스 크레디스위스(CS)로 전이됐으며 글로벌 금융권 전반의 붕괴 공포 사이클(뱅크데믹, 은행+팬데믹)로 이어졌다.
이런 긴축의 후폭풍이 닥치고 있는 상황에서도, 물가는 여전히 끈적하고(sticky), 고용시장 역시 탄탄하다. 물가와 뱅크데믹 사이에서 제롬 파월 Fed 의장이 ‘인플레이션 파이터’ 역할을 지속할 것인지를 놓고 고심에 빠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美 1년간 9차례 인상…물가 9→6%대 하락
전 세계 금리인상의 서막이 열린 건 지난해 3월16일(현지시간). Fed는 예고한 대로 3년 3개월 만에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올렸다. 이후 1년간 4.75%포인트에 달하는 금리인상이 이뤄졌다.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이 1년간 진행된 것이다.
길고도 깊었던 긴축의 효과는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6월 9.1%에서 올해 2월 6.0%까지 하락했다. 3월에는 5%대(클리블랜드 연방준비은행 전망치, 5.22%)까지 내려올 가능성이 점쳐진다. 탄탄했던 고용 역시 둔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3월 비농업 신규 고용이 23만6000명으로 1월(47만2000명)과 2월(32만6000명) 보다 낮은 수준을 나타냈다. 6개월 평균치(33만4000명)와 견줘도 줄었다.
하지만 종전선언을 하기에는 부족한 수준이다. Fed가 눈여겨 보는 개인소비지출(PCE) 물가 상승률은 2월 5%로 정책금리 수준과 겨우 같아졌다. 목표치(2%) 보다는 여전히 높다. 비농업 신규 고용 역시 둔화됐지만 코로나19 이전 평균(22만여명) 보다는 많다. 3월 실업률은 3.5%로 전월(3.6%)보다 오히려 하락했다.
인플레이션의 불씨가 완전히 잡혔다고 보기 어렵다. 긴축 기조의 끝에 다다른 것 같지만, 여기서 금리의 변곡점을 만들어야 할지 고민이 되는 지점에 서 있는 것이다. 지난 1년 간 대표적 매파로 활동해 온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의 제임스 불러드 총재는 "고용시장이 탄탄하다면 금리인상이 필요하다"며 "Fed가 몇번 더 금리를 올려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SVB 사태 다음은
그렇다고 지금과 같은 긴축을 이어가기에도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긴축의 여파는 시장을 할퀴고 있다.
금리인상의 충격이 지난달 예상치 못한 SVB 파산발(發) 은행 위기란 형태로 나타난 것. 금리가 오르자 조달비용이 상승한 기업들이 예금을 인출했고, SVB는 미 국채를 팔아 마련한 자금으로 예금 반환에 나섰다. 하지만 금리와 반대로 움직이는 국채 가격 하락으로 SVB가 국채를 손절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뱅크런(대규모 예금 이탈)으로 번졌고, 급기야 은행은 파산에 이르렀다. 그 여파로 유럽 CS 역시 UBS에 매각되는 등 설립 167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연초만 해도 미국에선 경기 침체 없이 인플레이션을 끌어내릴 수 있다는 노랜딩(no landing·무착륙) 시나리오가 언급됐다. 하지만 SVB 사태는 ‘상처 없는 긴축은 없다’는 격언을 남기며 또다른 국면으로의 전환점이 됐다. 블룸버그는 "Fed는 큰 충격 없이 통화정책 바꾸는 데 뛰어나지 않다"며 "SVB 사태가 증거물 1호"라고 지적했다.
‘인플레이션 학살자’란 평가를 받는 폴 볼커 Fed 의장 재임 당시와 유사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1976년 초 5%를 밑돌던 미국의 물가 상승률은 1979년 11%까지 치솟았다. 1979년 취임한 볼커 의장은 당시 연 11%였던 기준금리를 2년 만인 1981년 연 19%까지 인상했다. 경기 침체로 기업들은 파산하고 실업률은 10%까지 치솟았다. 급격한 금리인상으로 3000여곳에 이르는 저축대부조합(S&L)과 중소형 은행이 문을 닫았다. 볼커 의장은 물가 상승률을 1982년 말 4%대로 끌어내렸지만 대가는 혹독했다.
시장은 뱅크데믹의 전이가 어디로 이어질지 우려하고 있다. 오는 2025년까지 1조5000억원(약 2000조원)의 대출 만기가 돌아오는 미국 상업용 부동산 시장이 폭탄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고점 대비 40% 가까이 빠진 데다, 이번 사태로 중소형 은행이 대출 규제를 강화할 경우 신용 경색이 심화될 수 있어서다.
각국 중앙은행 ‘디커플링’
미국을 쫓아 금리를 올렸던 국가들은 제 살 길을 찾아 나선 상황이다. 호주 중앙은행은 지난 4일 기준금리를 연 3.6%로 동결했다. 지난해 5월부터 10차례 연속 이어온 금리인상을 중단한 것이다. 캐나다(3월)와 인도네시아(2월), 말레이시아(1월)도 올 들어 금리 인상을 중단했다. 우리나라도 1년 연속 금리인상을 지속하다가 지난달 기준금리를 3.5% 동결한 데 이어 11일에도 현행 금리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 은행은 올초까지만 해도 국내 물가를 잡는 동시에 미국의 고강도 긴축 및 달러 강세에 따른 통화가치 하락, 자본 유출을 막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국가들마다 각기 다른 경제 체력을 갖춘 데다 가계·기업의 자금난이 악화, 성장의 발목을 잡으면서 1년 만에 ‘각자도생’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연내 기준금리를 내리는 신흥국들이 늘어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미국 투자은행(IB)인 JP모건은 올해 헝가리·칠레·페루·체코·콜롬비아 등 5개국이 2~3분기 내에 금리를 인하할 것으로 예상했다.
갈림길에 선 Fed
향후 금리의 향방은 안개 속에 갇혔다. 파월 Fed 의장이 1980년대 인플레이션을 잡은 폴 볼커 Fed 전 의장의 길을 걷는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뱅크데믹을 만나 금리인상 지속이냐, 중단이냐의 갈림길에 놓였다는 분석이 나온다. CNBC는 Fed가 고물가와 씨름하는 가운데 은행 위기까지 불거지면서 향후 정책 방향과 여파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시장에선 다음달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0.25%포인트 추가금리 인상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한다. 앞서 FOMC는 올해 최종금리 예상치로 5~5.25%를 제시한 영향이 크다. 다만 레이몬드 제임스 앤 어소시에이츠 웰스 매니지먼트의 로스 해밀턴 부사장은 "Fed는 어려운 목표를 갖고 있다"며 "상황을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을 지속하길 원한다. 앞으로 상황은 진흙처럼 불투명하다"고 분석했다.
권해영 기자 rogueh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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