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미 정보기관 도청 폭로됐는데 지나치게 신중한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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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보기관이 우리 대통령실을 도·감청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원론적인 입장만 전해왔고, 도청 논란은 흐지부지됐다.
당시 독일 정부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 휴대전화 도청 의혹이 불거지자 독일 주재 미국 대사를 불러 항의했다.
미국이 그런 입장을 보이더라도 피해자인 우리 정부가 보조를 맞출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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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보기관이 우리 대통령실을 도·감청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미국 언론을 통해 공개된 기밀문건에는 지난달 말 사임한 김성한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외교비서관이 나눈 대화가 그대로 담겨 있다. 미국의 한국 포탄 수출 요청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책 논의가 주요 내용이다. 의혹이 사실이라면 명백한 주권 침해 행위다.
대통령실과 정부 대응은 지나치게 신중하다. 대통령실은 10일 “상황 파악이 끝나면, 필요할 경우 미국에 합당한 조치를 요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날에는 “미국 측과 필요한 협의를 할 예정” “과거의 전례, 다른 나라의 사례를 검토해 보겠다”고 말했다. 사실 관계를 먼저 확인하겠다는 신중한 자세지만 소극적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미국은 과거에도 도청 의혹을 명확하게 인정하거나 사과한 적이 없다. 2013년 미 국가안보국(NSA) 요원이던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로 주미 한국대사관 도청 의혹이 불거졌다. 당시 정부는 외교 채널을 통해 미국에 우려를 표명한 뒤 설명 및 조치를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원론적인 입장만 전해왔고, 도청 논란은 흐지부지됐다. 전례에 따른다면 이번 사건도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큰 셈이다. 당시 독일 정부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 휴대전화 도청 의혹이 불거지자 독일 주재 미국 대사를 불러 항의했다. 메르켈 총리도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분명한 항의 입장을 밝혔다.
미 정보기관의 불법 정보 수집 행위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외부로 드러난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정부는 엄중하게 항의하고 재발 방지를 요구해야 한다. 주권국가의 당연한 권리다. 도·감청이 통상적인 관행이라고 유야무야 넘길 일이 아니다. 미국이 그런 입장을 보이더라도 피해자인 우리 정부가 보조를 맞출 필요는 없다. 이달 말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방문을 고려해 소극적으로 대응한다는 인상을 줘서도 안 된다. 굳건한 한·미 동맹과 불법적인 도·감청은 별개의 사안이다. 오히려 엄중하게 대응하는 게 정부의 협상력을 높이는 길이다.
국민은 대통령실 보안이 얼마나 허술하기에 국가안보실장과 외교비서관의 대화 내용이 다른 나라 정보기관의 손에 넘어가는지 의아해하고 있다. 용산 대통령실 보안 시설이 부실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기회에 꼼꼼하게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국가정보원과 대통령 경호처가 이미 해야 했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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