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주의 시선] 세로 신드롬과 정치 공진화<共進化>
말(馬)이 요즘처럼 장안의 화제가 된 적이 있었을까. 서울 광진구 어린이대공원 탈출 소동을 벌인 세 살배기 얼룩말 ‘세로’가 뉴스에 오르내리는 듯싶더니 단번에 인기 스타 반열에 껑충 올라섰다.
한동안 동물원 내실에서 안정을 취하다 며칠 전부터는 방사장에 다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애틋한 탈주 사연의 주인공을 눈과 마음에 담아두려고 사람들이 앞다퉈 찾아들고, 학생들 현장 체험 학습장으로도 제격으로 꼽히면서 어린이대공원은 일순에 핫플레이스가 됐다.
가족도 친구도 하나 없이 외톨이로 동물원 우리 안에 남겨졌던 세로는 억압의 굴레에서 완전한 자유를 갈구하는 가엾고 외로운 존재로 의인화하면서 뭇사람의 감정선을 자극했다. 세로의 꿈을 응원한다는 패러디물이 넘쳐난 것은 그 같은 연민이 부른 연쇄작용 효과일 터이다. 이참에 동물권·동물복지 담론을 제대로 한번 펼쳐보자는 목소리 또한 분출하고 있으니 한마디로 ‘세로 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말은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역마(驛馬)와 전마(戰馬), 농마(農馬) 등으로 세상을 주름잡던 국가 핵심 전략자산이었다. 그런가 하면 나귀나 노새 같은 말과(科) 동물들은 고집불통 혹은 잡종으로 천대받으면서도 오랜 세월 고달픈 서민의 생계수단이자 벗이 되어주었다. 동서양 가릴 것 없이 문학이나 예술 작품의 감초 역할로 사실주의의 생기를 불어 넣어주기도 했다.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모밀밭께로 흘러간다.’(이효석『메밀꽃 필 무렵』,1936) ‘노새가 간혹 돌부리를 걷어찰 때마다 번쩍번쩍 불똥이 튀었다.’(니코스 카잔차키스『그리스인 조르바』,1946)
테크놀로지 역사에 널리 알려진 20세기 ‘등자 논쟁’ 속 동물도 다름 아닌 말이다. 등자(鐙子)는 말 안장 좌우 옆구리 쪽으로 늘어뜨린 둥근 고리 모양의 마구다. 말 등에 올라타기 편하라고 고안된 일종의 받침대로, 기원전 2세기쯤 동양에서 발명돼 7~8세기 서양으로 전래했다는 게 통설이다. 그런데 이게 뜻밖에도 기병의 발을 고정하고 하체를 말에 밀착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손의 자유를 가져다줬다. 말을 타고서도 무기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게 되면서 전투 양식의 차원이 달라졌다. 기병의 규모와 위상은 날로 확대됐고, 그들의 활약에 대한 보상으로 정복지가 분배되면서 영주제 확립의 토대가 됐다는 게 논쟁의 시발점이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작은 기술 하나가 중세 봉건제도라는 엄청난 사회변동을 추동했다는 기술 결정론은 센세이셔널했다. 기술에서 사회 변화로의 일방향성 인과관계에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느냐가 핵심 쟁점이 됐다. 기술은 사회변동의 독립변수가 아니고 사회적 맥락과 구성의 산물일 뿐이라는 반론이 거세지면서 대논쟁으로 비화했다. 하지만, 이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해석적 맥락의 차이일 뿐 기술과 사회, 양자가 밀접하게 맞물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화를 거듭해 왔다는 점에선 딱히 이론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기술과 사회의 공진화(共進化) 적 관점의 대전제는 공리공생의 상호작용이다. 어느 한쪽의 진화적 반응이 상대의 선택적 환경에 변화를 주고, 그 자극을 서로 지속해서 주고받으며 발전적으로 진화해 나간다. 때로는 조응하고 때로는 갈등을 겪으며 최적의 합일점을 찾아 나간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나홀로식 독단이나 독선, 독주는 애당초 설 자리를 잃는다.
■
「 왜곡된 정치구조가 양극화 초래
국회 선거제 개편 난상토론 돌입
정치 개혁으로 퇴행∙공멸 막아야
」
국민적 불신과 외면으로 궁지에 처한 여야 정치가 곰곰이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극단적 대립의 정치를 끊고 타협과 절충을 통한 합의 도출이라는 민주적 가치를 복원해 달라'는 민초들의 아우성은 줄곧 외면당했다. 한쪽은 대화의 문에 단단히 빗장을 질렀고, 다른 쪽은 입법독주에 탄핵 으름장을 남발한다. 이대로 방치하면 우리 정치에 더는 희망이 없다는 위기감이 임계치에 다다랐다. “여야의 극한적 대립은 선거제도로부터 왜곡된 정치구조 때문”(김진표 국회의장)이라는 진단이 결코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선 안 되는 이유다.
국회가 임시처방전(선거제 개편안)을 들고 전원위원회를 소집해 끝장토론에 들어갔다. 저변에 드리운 합의 도출에 대한 회의론은 여전히 짙다. 끝내 반전을 일으켜내지 못하면 결말은 공진화의 불발이 초래할 퇴행이자 공멸일 것이다. 앞으로 남은 몇 차례 전원위원회 공개토론 현장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일이다.
혈혈단신 의지할 곳 없던 세로에게도 머지않아 배필이 생긴다고 한다. 짝은 있되 상생의 길을 잃고 헤매온 우리 정치만은 절대 닮지 말았으면 한다.
임종주 정치에디터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내 기억속 교생 선생님은..." 김건희 옛 제자가 편지 보낸 사연 | 중앙일보
- 소년에게 입 맞춘 뒤 혀 내밀며 부적절 언행…달라이라마 사과 | 중앙일보
- 여성은 19세, 남성은 40세부터 늙는다…AI가 찾아낸 ‘현대판 불로초’ | 중앙일보
- 둘째 낳으면 더 준다?…100만원 넘는 연금, 男 55만명 女 2만명 | 중앙일보
- 피자보다 값싼 필로폰…거기에 피싱도 섞었다, 무서운 콜라보 | 중앙일보
- "문자폭탄에 기름 붓는 정치 참담"…오영환 '배지' 뗄 결심 왜 | 중앙일보
- "우크라 포탄지원 유출, 한국엔 심각…러시아엔 기막힌 타이밍" | 중앙일보
- [단독] "美, 북 ICBM 발사 보름 전에 알았다…시긴트로 파악" | 중앙일보
- 밥값 깎아 MZ마음 잡을까…여야 불 타는 '1000원 아침밥' 경쟁 | 중앙일보
- "1시간 160회 구타" 층간소음 이웃 때려 숨지게한 전 씨름선수 실형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