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전 논쟁하다 1급 기밀 '척'…폭로의 시작은 게임 채팅방

김서원 2023. 4. 10.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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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의 대규모 기밀문건 유출 사태가 지난달 초 온라인 게임 채팅 플랫폼인 '디스코드(Discord)'에서 시작된 것으로 나타나면서 유출 경위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있다.

9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디스코드는 전 세계 게임 이용자들이 자유롭게 공개 채팅방을 개설할 수 있는데, 이번 사태 역시 이같은 공개 채팅방을 통해 유포된 것으로 드러났다. 미 법무부와 연방수사국(FBI)은 이번에 유출된 문건의 내용과 양이 방대한 만큼 미국인의 소행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 유출자와 유출 경위를 수사 중이다.

디지털 자료를 전문적으로 분석하는 영국의 탐사 매체 벨링캣은 "문건의 최초 유포자를 찾을 순 없었으나, 기밀문서 촬영본(사진 파일)이 지난달 4일 디스코드의 '마인크래프트' 게임 채팅방에 처음 올라왔다"고 9일 전했다. 마인크래프트는 전 세계 수백만 명이 즐기는 온라인 게임으로 디스코드의 공식 채팅방에서만 약 99만3000명이 활동 중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최신 전황을 담은 미국 정부의 기밀문건으로 알려진 사진이 트위터를 통해 유포됐다. 문건 맨 위에 '1급 기밀(Top Secret)'이란 표시가 있다. 중앙일보는 이 문건의 진위를 독자적으로 검증하지 않았다. 트위터 캡처

매체에 따르면 당시 마인크래프트 채팅방 안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두고 이용자들 간 논쟁이 있었는데, 이중 한 명이 "여기 유출된 문서가 있다"며 종이로 출력된 문건이 찍힌 사진 10여장을 채팅방에 올렸다. 문건들 중에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사상자 수 등이 담긴 '1급 기밀(Top Secret)' 문서가 포함돼 있었고, 일부 문서엔 외국과 공유하지 않는 기밀이라는 뜻인 'Secret/NOFORN'이란 표시도 있었다.

디스코드발 문건 폭로는 다른 소셜미디어(SNS)로 퍼져나갔다. 미국의 극우 성향 온라인 게시판인 '포챈(4chan)'을 시작으로 트위터·텔레그램 등으로 확산된 것이다. 이런 상황을 포착한 뉴욕타임스(NYT)는 "취재 결과 진짜 기밀문서일 가능성이 높다"며 지난 6일 첫 보도에 나섰다.

신문에 따르면 지금까지 유출된 문건만 총 100여쪽 분량으로 추정된다. 현재 디스코드에선 이와 관련한 사진 파일이 모두 삭제된 상태지만, 트위터 등에선 일부 문건이 여전히 게시된 상태다. 이와 관련, 미 국방부가 디스코드 측에 문건 삭제를 요청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디스코드 측은 이와 관련한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고 WSJ는 전했다.

중앙일보가 확보한 최근 SNS에 유출된 미국 정부의 기밀정보 문건 중 일부. 해당 부분에는 미국의 포탄 판매 요청에 고심하는 한국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들의 대화 내용이 담겨 있다. 김필규 특파원

미국 당국은 해당 문건이 동맹국과 적국이 아닌 미국인에 의해 유출됐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문건의 진위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우크라이나 최신 전황뿐 아니라 중국과 중동·아프리카 동향 등 그 내용과 주제가 광범위하고 양도 상당하다는 이유에서다.

이와 관련, 워싱턴포스트(WP)는 "유출된 문건들이 백악관, 국방부 등 미 정부기관 내에서 공유되는 미 중앙정보국(CIA)의 '세계 정보 리뷰' 보고서 형식과 유사하다"고 전했다.

마이클 멀로이 전 미 국방부 차관보는 로이터 통신과 인터뷰에서 "많은 문건이 미국 측에서만 나온 것이라 현재 초점은 미국인에 의한 유출로 맞춰져 있다"고 말했다. 통신은 또 익명의 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미 수사 당국은 (문건을 열람할 수 있는) 불만을 품은 관계자의 내부 소행 등 4~5가지의 유출 동기 관련 가설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현재로선 문건이 해킹 당했는지, 고의로 유출된 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상태라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미 국방부는 유출 문건의 일부가 수정되긴 했으나, 일부는 공식 기밀문서인 것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미 국방부는 9일 성명을 통해 "유출 문건에 진짜 미 정보기관이 작성한 민감한 극비 자료가 포함된 것으로 보고, 부처 간 협력으로 문건의 유효성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1월 1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 솔레다르 인근 최전선에서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 진지를 향해 다연장로켓을 발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 수사당국은 유출 배후에 친러시아 세력이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다. 이와 관련, 로이터는 복수의 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문서의 출처를 오인해 분란을 조장하거나, 미국의 안보 이익 훼손을 목적으로 허위 정보를 유포하기 위해 문건 내용이 조작됐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군사정보국은 "러시아 특수부대의 공작"으로 추정했다.

반면 미국이 독일내 미군 기지에 우크라이나 군인을 초청해 봄철 작전을 위한 '워 게임'을 벌인 시기와 문건의 생성 날짜(2월 말~지난달 말)가 맞아떨어졌다는 점에서 우크라이나군이 유출했을 수도 있다고 폴리티코는 전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소행으로 몰기 위한 역공작일 수 있다는 얘기다.

온라인 게시판을 통한 국가 기밀문서의 유출 사건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엔 온라인 게임 '워 썬더' 관련 게시판에서 게임에 추가된 F-16 전투기의 성능에 대해 논쟁이 일었는데, 한 이용자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고자 F-16 관련 민감한 내용이 담긴 군 기밀문서 일부를 유출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앞서 2019년 영국 총선을 앞두고 미국의 온라인 게시판 포챈과 레딧 등에선 영·미 간 무역 관련 문서가 오른 적도 있다.

김서원 기자 kim.seo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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