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상 염탐법까지 까발린 '100쪽 폭탄'..."美정부 공황상태"
미국 정부의 대규모 기밀문건 유출 사태가 일파만파 커지고 있다. 일부 문건에 미 중앙정보국(CIA) 등이 우방과 적을 감시한 방법이 상세히 적혀 있는 것으로 나타나면서 관련 정보기관들에 비상이 걸렸다. 미 연방수사국(FBI)과 법무부가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한 가운데, 미 국방부는 “민감한 극비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보이는” 이들 문건의 유효성을 평가 중이라고 밝혔다.
9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총 100여쪽 분량으로 추정되는 수십 건의 기밀문서에는 CIA의 구체적인 정보수집 방식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매체는 “일련의 상세한 브리핑과 요약본은 미국의 내밀한 스파이 활동을 들여다볼 수 있는 드문 창”이라며 “CIA가 세계 정상들의 비공개 대화를 엿듣기 위해 정보원을 모집한 장소 등 여러 비밀이 적혀 있다”고 전했다.
이미 공개된 문건에 한국 등 동맹국의 고위 관계자를 도ㆍ감청한 내용들이 담겼다고 폭로된 상황에서 미국의 은밀한 스파이 방식까지 까발려진 셈이다. WP는 “50쪽 분량의 기밀문서를 검토한 결과, 거의 모든 분야의 미 정보기관 활동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며 “국가안보국(NSA), CIA, 국방정보국(DIA), FBI 등은 물론 수십억 달러 규모의 정찰위성을 담당하는 가장 비밀스러운 정보기관인 국가정찰국(NRO)의 정보활동도 설명돼 있었다”고 밝혔다.
이같은 기밀 중에는 우크라이나와 싸우는 러시아 용병 조직인 바그너그룹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 회원국에서 무기를 사들이기 위한 모의를 어떻게 도청했는지, 미국이 러시아군의 이동을 추적하기 위해 어떤 종류의 위성 이미지를 썼는지 등도 포함됐다.
이를 두고 정보 관계자들 사이에선 “전화통화 내용 등 ‘신호정보(SIGINT)’뿐 아니라 각국의 고위급 인사들이 미 관계자들과 주고받은 고급 첩보를 정리해 워싱턴에 보낸 내용도 상당할 것”이란 풀이가 나온다.
이처럼 미 정보당국의 은밀한 첨단 정보 역량이 노출되면서 관련 당국자들은 충격에 빠졌다. WP는 복수의 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미 국방부 수뇌부가 상당한 공황 상태를 보이고 있다”며 “관련국들도 이번 폭로에 따른 피해 평가를 하느라 분주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공식적인 대응을 자제하던 미 국방부는 9일 성명을 통해 “소셜미디어에서 떠돌고 있는 문건 촬영본들은 민감한 극비 내용을 포함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문건 촬영본의 유효성을 살피며 평가 중”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백악관과 국무부는 이날 따로 논평을 하지 않았다.
"유출자 색출이 최우선 과제"
미 국방부의 요청으로 FBI 등은 지난 7일부터 기밀문건 유출 경위 등을 수사 중이다. 다만 미 법무부는 9일 현재 수사 진행 상황을 묻는 언론들의 질문에 사안의 중요성 때문인지 어떤 정보도 밝히지 않았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정보 접근자와 정보 공개 동기 등을 밝히는 게 이번 수사의 최우선 과제”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와 관련, FBI 고위 간부 출신인 조슈아 스쿨은 “FBI는 누군가 반역 행위를 저지른 것처럼 이번 사건에 접근하고 있다”며 “모든 방식을 총동원해 가능한 한 신속히 누가 그랬는지 색출하려 할 것”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말했다.
유출된 문건들에는 수사에 필요한 단서도 일부 남아 있다. WSJ에 따르면 A4 용지에 인쇄된 문서와 프리젠테이션 사진들은 보안시설에서 밀반출하기 위해 두 번 접힌 모습이다. 신문은 또 “사진 여백에 특정 상표(고릴라)의 접착제, 신발, 망원경 설명서 등 유출자를 특정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다양한 물건들도 보인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러시아가 이번 사건의 배후일 수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이 동맹국 등 우방의 지도부를 감시한 내용들도 문건에 담긴 만큼 우크라이나 지원으로 뭉친 서방의 연대를 깨기 위한 “상호 불신”을 목표로 한 공작일 수 있다는 관측이다.
이와 관련, 익명을 요구한 한국의 전직 정보당국 고위 관계자는 본지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포탄 우회 지원과 관련한 한국 대통령실 최고위층(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전 외교비서관)의 대화 내용이 유출된 것도 이런 논란을 뒷받침한다”며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는 상황에서 확실한 군수 지원 능력을 갖춘 한국과 같은 나라가 추가 지원에 나설 공간을 없애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만약 러시아가 실제 배후라면 한국의 무기 지원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일종의 경고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자중지란 노린 폭로일 수도
실제로 유출된 문건 중 상당수가 우크라이나 전황을 다룬 것도 러시아의 개입 가능성을 높이는 대목이다. 일례로 지난 2월 말 미 국방부의 우크라이나 전황 평가를 다룬 문건엔 “우크라이나 방어를 위한 미사일 저장고가 고갈돼 방공망 전체가 무너지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쟁 판도를 바꿀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당시 미 국방부의 평가에선 우크라이나 방어의 89%를 차지하는 옛소련제 S-300ㆍ부크(Buk) 대공 미사일의 재고가 늦어도 5월 초엔 완전히 고갈될 것으로 예측됐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내용이 미국 사회에 유포되면 ‘깨진 독에 물 붓기’라는 우크라이나 지원 비판 여론을 더 부채질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9월 29일 크림반도 연안에서 러시아 공군의 수호이(Su)-27 전투기가 영국 공군의 RC-135 ‘리벳조인트’ 정찰기를 격추하려 했던 사실을 담은 문건도 이번에 공개돼 논란이 일고 있다. 당시 사건 이후 벤 월리스 영국 국방장관은 하원에 러시아 전투기들의 위협 비행과 미사일 발사 사실만 보고했지만, 문건에 따르면 “거의 격추될 뻔한 사건”이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나토 회원국인 영국의 군용기가 격추됐다면 확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영국 정부가 애써 이런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유럽인들에게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공포감을 확산시키기 위해 러시아가 이같은 문건을 입수해 폭로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상진 기자 kine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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