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 보이콧에 립싱크 응원까지? 갈라진 전주성
[이준목 기자]
▲ '팬들의 응원은 공짜가 아니다' 9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23 프로축구 K리그1 전북 현대와 인천 Utd의 경기. 이날 중위권에 머무는 전북 현대 응원단이 구단과 코치진에 대한 비판이 적힌 현수막을 내걸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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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면전쟁(Two front war), 전쟁에서 한 세력이 각기 다른 상대와 2개 이상의 전선을 형성하는 상황을 일컫는다. 힘을 분산해야 하는 만큼 선택과 집중이 어렵고 전력 소모가 가중되기에 전쟁에서는 금기로 여겨진다. 바깥에서 적과 총력을 다해 싸우기도 바쁜데, 만일 안에서 내전까지 벌어진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다.
스포츠에서도 이런 상황이 가능할 수 있다. 바로 프로축구 전북 현대는 요즘 사실상의 양면전쟁을 치르고 있다. 시즌 초반 가뜩이나 부진한 성적으로 애를 태우고 있는 전북이 설상가상 팬들과의 극한 대립으로 이중의 곤경에 빠져있다.
김상식 감독이 이끄는 전북은 4월 9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1 6라운드 인천 유나이티드전에서 아마노 준과 하파 실바의 연속골에 힘입어 2-0으로 승리했다. 귀중한 1승을 추가한 전북은 2승 1무 3패, 승점 7점으로 7위로 반등했다.
우승후보로 꼽힌 전북은 5라운드까지 승점 4점에 그치며 예상밖의 부진을 겪었다. 급기야 지난 포항 스틸러스전에서는 분노한 서포터즈들이 홈경기에 응원을 보이콧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1-2로 역전패한 뒤에는 선수단 버스를 가로막고 감독콜을 외치며 항의하기도 했다. 이른바 '4.1 상식대치' 사태다.
당시 코칭스태프를 태운 버스는 팬들의 일부 양보로 선수단 버스만 먼저 빠져나간 후에도 총 2시간 넘게 가로막혀 팬들과 계속 대치해야 했다. 결국 김상식 감독이 뒤늦게 모습을 드러내며 대화에 나섰지만, 극명한 입장차를 확인하며 오히려 팬들과 기싸움으로 변질되면서 얼굴만 붉힌 채로 마무리됐다. 김 감독과 함께 팬들의 퇴진 압박을 받고이는 허병길 대표는 지난 3일 구단 홈페이지와 SNS 등에서 최근의 상황에 대한 사과문을 올렸지만 팬들의 반응은 여전히 싸늘했다.
6라운드 인천전은 김상식 감독과 전북 입장에서는 사실상 단두대 매치나 마찬가지였다. 벼랑 끝에 몰린 김 감독은 이날 경기에서 기존의 포백 대신 박진섭-김건웅-구자룡을 투입하는 스리백 전술을 내세우며 수비에 변화를 줬다. 또한 공격에서는 하파 실바, 송민규, 이동준을 모두 교체로 활용하여 후반에 승부수를 걸었다.
다행히 전술변화가 적중하며 전북은 두 이적생 아마노와 실바가 후반 나란히 골맛을 봤고 모처럼 무실점으로 인천의 공세를 막아내며 값진 승리를 거둬 한숨을 돌릴수 있었다.
하지만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북 선수단은 마음껏 웃지 못 했다. 인천은 잡았지만 정작 팬들과의 갈등은 아직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날도 전주성에는 응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전북 서포터즈에 이어 또다시 응원을 보이콧했다.
전북 응원단은 골을 넣거나 승리로 경기가 끝났을 때마다 울려퍼지는 전북 응원가 '오오렐레'를 부르는 것도 거부했다. 대신 김상식 감독-허병길 대표이사의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거나 구단을 비판하는 걸개를 내거는 것으로 목소리를 냈다.
물론 경기가 치열해지고 전북 선수들이 좋은 활약을 펼치면 간간이 환호가 터져나오거나 개개인의 응원은 있지만 서포터즈 차원의 조직적인 응원은 경기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팬들이 지난주 대치 사태 이후 구단 측과의 앙금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전북 팬들이 조용하다보니 오히려 원정팀이고 숫자도 훨씬 적은 인천 팬들의 응원함성이 전주성에서 더 크게 울려퍼지는 기묘한 장면이 연출됐다.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선수들을 독려하는 인천 팬들의 모습은 전북과 대조를 이뤘다.
급기야는 후반으로 갈수록 코미디같은 장면들까지 속출했다. 장내 아나운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팬들에게 함께 응원하기를 열심히 유도했지만 호응은 고사하고, 도리어 팬들의 면박만 당하며 머쓱하게 물러나야 했다.
또한 구단은 팬들이 응원을 계속 보이콧하자, 이번엔 응원가를 대신 앰프로 틀어놓거나 응원하는 장면을 녹화한 동영상을 전광판에 올리는 초유의 '립싱크 응원'으로 아예 대체해버리며 팬들과 기싸움을 벌였다. 코로나19 시기도 아니고 엄연한 유관중 경기에서는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난데없이 고막을 때리는 립싱크 어택에 어처구니없어진 전북 팬들은 단체로 "앰프 꺼"라는 구호를 외치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발끈한 몇몇 팬들은 욕설을 내뱉거나 즉석에서 분노의 현수막을 추가 제작하는 것으로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전북의 승리가 사실상 굳어진 경기 막판에도 전북 관중석에서는 응원 대신 다시 감독과 프런트 퇴진을 요구하는 단체 구호가 더 우렁하게 울러퍼졌다.
같은 편끼리 하나되어 똘똘 뭉쳐야 할 홈구장에서, 선수들은 응원도 받지 못 하고 외롭게 싸워야 했고, 구단과 팬들은 서로 대립하며 기싸움을 벌이는 이 기묘한 풍경은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그래서인지 경기를 이기고도 김상식 감독과 전북 선수들의 표정은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그나마 이날은 전북이 모처럼 승리했기에 경기 후 팬들의 집단행동 같은 돌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경기가 끝나고 선수단이 퇴근하는 상황에서는 버스 앞에서 기다리던 팬들이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기도 했고 선수들도 가볍게 인사를 하거나 사인을 해주는 것으로 화답했다. 다만 김상식 감독이 등장했을 때는 분위기가 여전히 냉랭했다.
여전히 팬들의 집중비난을 받고 있는 김상식 감독은 "매 경기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준비하고 있다. 팬들의 비판을 받아들이며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더 이상 뒤로 갈 곳이 없다"고 고백하며 "그간 팬분들과 소통이 부족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성적을 끌어내고 좋은 경기력으로 어필한다면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라 생각한다"는 의견도 밝혔다.
전북은 지난 시즌도 5라운드까지 부진하다가 이후로 급격한 상승세를 타며 우승 경쟁에 뛰어든 바 있다. 아직 시즌 초반이고 전북의 전력을 감안할 때 다시 반등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다.
문제는 팀성적도 성적이지만 팬들과의 갈등을 해소할 출구전략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대로 홈경기마다 한쪽은 응원을 보이콧하고 한쪽에선 립싱크를 틀어놓는 해프닝을 언제까지 반복할 수는없다.
한편으로는 구단과 팬들이 서로 대화의 시간을 가져야 할 필요도 있어보인다. 전북은 지금 더이상 팬들과 충돌할 때가 아니다. 지금의 갈등은 단지 올시즌의 성적 부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간 '소통'에 대한 양측의 오해와 불만이 장기간 누적되면서 벌어진 문제에 더 가깝다는 게 중론이다. 서로 한 발 물러서서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전주성은 본래 원정팀의 무덤으로 불릴 만큼 홈팬들의 뜨거운 함성으로 가득했던 구장이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서포터와 홈팬의 열광적인 응원은 전북이 가진 또다른 힘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다. 누적된 불신과 갈등 속에 편안해야 할 홈이 오히려 원정보다 더한 가시방석이 되어버린 모습은 격세지감만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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