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중대재해의 나라
산업 현장의 사망 사고를 강하게 처벌하는 중대재해처벌법 ‘1호 판결’이 지난 6일 나왔다. 지난해 경기도 한 요양병원 공사장에서 발생한 하청업체 근로자 A씨 추락 사고에 대한 형량은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이었다. 법원은 A씨가 숨진 책임이 원청업체 대표인 B씨에게 있다고 판결했다. 중대재해법은 하청 안전사고 책임을 원청 사업주·경영책임자까지 묻도록 한다. B씨가 사고 방지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취지였다.
중대재해 1호 처벌은 과도한가, 부족한가. 판결이 확정되면 B씨는 감옥에 가진 않는다. 대신 징역형 전과 기록은 남게 된다. 이를 두고 노동계에선 ‘솜방망이’라고 비판했고 경영계에선 ‘너무 무겁다’고 하소연했다. B씨는 책임을 대부분 인정했고 치열한 법리 다툼은 없었다. B씨가 유족에게 위로금을 지급한 사실은 유리한 양형 사유로 참작됐다.
중대재해법 사건 1심은 판사 1명이 선고하는 단독 재판으로 진행된다. 2심에 가야 비로소 지방법원 항소부 판사 3명이 함께 심리하게 된다. 이런 구조는 심지어 법원마저 착각할 정도다. 당초 ‘중대재해 1호’ 선고는 창원지법 마산지원에서 나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선고 이틀 전 돌연 연기됐다. 합의부에 잘못 배당해 재판한 걸 뒤늦게 깨달아서다. 한겨레신문에 따르면 지난해 기소된 중대재해 사건 11건 중 이렇게 잘못 배당된 사건이 7건이었다. 검사와 변호사도 배당이 잘못됐다는 걸 몰랐던 경우가 태반이었다. 한 법조인은 “법정에 있던 모두가 ‘설마 중대재해 사건이 단독 재판부 소관이겠나’ 싶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배당 기준을 세운 건 국회다. 중대재해법을 둘러싼 사회의 소란함과는 별개로, 국회는 법을 제정하며 이미 중대재해 사건을 과실치사 사건 수준으로 정의했다. 여기에 산업 현장의 다양한 참극을 검찰과 법원이 알아서 판단해 처벌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갖가지 안전사고에 대한 책임을 어디까지 얼마나 물을지 법 조항으로 명확히 정해 놓지 않아서 개별 검사와 판사의 판단에 사실상 모든 것이 달려 있다. 이들이 실질적인 입법 역할까지 맡고 있는 셈이다. 자꾸 ‘판례’가 중요하다는 말이 반복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판사 1명의 선고에서 대법원 판례로 확정될 때까지 수많은 사망 사고가 ‘사례’로 뒤따라야 한다. 기업들의 불안감을 파고든 변호사 업계만 중대재해라는 새로운 시장을 누리고 있다.
중대재해법은 입법 취지와 상관없이 형량을 놓고 벌이는 일종의 사법 게임이 돼 버렸다. 안전사고 발생 확률을 ‘0%’로 만드는 것엔 현실적 한계가 존재한다. 이에 기업들은 우리 대표님, 우리 회장님이 처벌받지 않을 방법을 찾는 데 혈안이 되고 있다. 처벌 수위를 높일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중대재해법 시행 이후인 지난해 50인 이상 사업장의 사망자 수는 256명이었다. 전년보다 오히려 8명 늘었다. 지난해 기소된 중대재해법 사건 11건 중 대기업은 없었다. 열악한 근로자가 계속 숨지고 영세한 사업자부터 잡혀가고 있다. B씨 회사도 설립 7년 차 중소기업이었다. 중대재해 ‘1호 판결’ 재판부는 선고 말미에 “피고인에게만 책임을 묻는 건 가혹하다”고 언급했다.
이대로면 중대재해법은 산업 현장의 사망 사고를 줄이기보다 풀기 어려운 사회적 문제를 사법에 떠넘긴 대표적 사례로 남을지 모른다.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관리·감독 인력을 충원하고 제도를 세심하게 다듬는 것은 품이 들고 어려운 길이다. 반면 사고가 벌어진 뒤 왜 강하게 처벌하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쉽고 편한 길이다. 우리는 나날이 복잡해지는 사회 문제를 ‘처벌이 능사’로 치부하는 데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다. 이런 시대에 검사 출신 대통령이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이제 법대로 하자는 말은 ‘더 이상 생각하기 싫다’는 말과 동의어로 들릴 지경이다.
양민철 산업1부 기자 listen@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찜질방 알몸 활보’ 20대男 입건…女수면실도 들어가
- ‘엠폭스’ 국내 지역사회 첫 감염 환자 나왔다
- ‘강남 살해 3인조’ 송치…“고인에 사죄” “3억원 받기로”
- “개인줄 알았는데”…길거리서 ‘툭’ 대변 흘리고 간 男
- 초등생 4명 덮친 대낮 만취운전… 9살女 끝내 숨져
- 손녀 친구 성 착취 혐의 할아버지 ‘18년→무죄’, 왜?
- 故현미 조카 한상진 오열…노사연 “이모 보며 가수 꿈꿔”
- “벽 뒤에 비밀금고”…손자가 공개한 ‘전두환 자택’ 내부
- “CCTV 있냐”더니…물 120t 쓰고 가버린 중국인 커플
- “조민, 이제 돌팔이 의사 노릇 하면 구속”…전여옥 직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