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의 시시각각] 학폭이 장난이었다는 아이들

양성희 2023. 4. 10.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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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학생 엄벌주의로는 한계
폭력과 감정 문해력 키워주고
교육적 해법 포기하지 말아야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정부가 학교폭력 징계 기록의 학교생활기록부 기재 기한을 2년에서 10년으로 연장하고, 징계 전력을 수시뿐 아니라 정시에도 반영하는 ‘학교폭력 근절대책’을 검토하고 있다. 가해 학생 엄단 원칙에 입각해 대입과 취업에서 확실하게 불이익을 주겠다는 것이다. 최근 자녀 학폭 이슈로 국가수사본부장에서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의 경우처럼, 일부 권력가 자제들의 학폭 가해 불공정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며, 청소년기 일탈이 평생의 커리어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과하다는 비판이 많다. 오는 12일 총리가 발표할 최종 대책에는 어떤 내용이 포함될지 지켜볼 일이다.

학폭 문제를 다뤄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킨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한 장면. [사진 넷플릭스]

2012년 학생부에 학폭 가해 사실을 명시하게 한 ‘학폭근절 종합대책’이 나온 지 10년, 그로 인해 학폭이 줄어들었다는 증거는 찾기 힘들다. 오히려 학생부 기재를 막기 위한 가해자 측의 불복과 소송으로 피해자ㆍ가해자 분리가 늦춰지며 피해자 보호가 미비했다는 지적이 많다. 앞으로 징계 기록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소송이 남발될 가능성이 크다. 피해자 보호·용서와 가해자의 사과ㆍ반성이라는 교육적 해법 대신 사법 절차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 “학교를 유사 사법체계로 만들 것”(한성준 좋은교사운동 공동대표)이란 우려도 나온다.
또 현행 소년법은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에 대해서도 ‘소년의 보호처분은 그 소년의 장래 신상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는데, 이보다 경미한 학폭으로 더 큰 불이익을 받는다면 형평에 맞지 않다. 점차 저연령화하는 학폭은 해당 안 된다는 문제도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의 2022년 학폭 실태조사(1차)에 따르면 초등학교 피해 응답률이 3.8%로 가장 높았고 중학교(0.9%), 고등학교(0.3%) 순이었다.
그런데 같은 조사(2차)에서 가해 학생들이 학폭을 한 이유 1위는 ‘장난이나 특별한 이유 없이’(62%)였다. 정순신 변호사 아들이나 학폭 드라마 ‘더 글로리’의 가해 학생들도 똑같은 얘기를 했다. “장난이었다.” 가해 학생을 포함한 전체 학생이 뽑은 학폭 원인 1위도 ‘장난이나 특별한 이유 없이’(66%)였다. ‘강해 보이려고’ ‘화풀이 또는 스트레스 때문’이란 응답이 뒤를 이었다.
결국 학폭 현장에서는 그 처벌의 강도와 무관하게, 폭력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말 그대로 ‘장난처럼’ 일어나는 학폭이 많다는 얘기다. 학생들은 학폭을 예방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교육 방법으로 ‘공감·의사소통·감정조절 등의 교육’(29%)을 꼽았는데 그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TC 유니트(Therapeutic Community Unit)’라는 교도소 제소자들의 집단상담ㆍ갱생 프로그램을 소개한 일본 다큐 ‘프리즌 서클’과 그 제작 뒷얘기를 다룬 동명의 책에 따르면, 범죄자들은 공통으로 ‘감정적 문해력(Emotional Literacy)’의 부족을 보였다. 감정적 문해력이란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며,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을 말한다. 감정적 문해력이 낮으면 분노 같은 특정 감정에 휘둘리지 않거나 대응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일종의 ‘감정 문맹’이다. 이 감정 문맹들은 ‘상대를 물건처럼 다루며 타인에게 가한 고통에 책임지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우리의 학폭을 여기에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지만, 학폭이 장난이었다는 아이들 역시 상대가 호소하는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감정 문맹들 아닐까. 어려서부터 폭력적 미디어, 게임 등에 노출돼 폭력에 대한 감정적 문해력이 떨어지고, 폭력을 행사하고도 아무 죄의식 없는 악순환을 낳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말이다. 그저 가해자 엄벌이 정답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어린 감정 문맹 뒤에는 "홧김에" "술기운에” “욱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성인 감정 문맹들이 있을 것이다. 학폭은 폭력을 부르는 우리 사회가 학교라는 보호벽을 뚫어버린 결과임을 인식하는 데서, 해법도 출발할 것이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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