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국에 포탄 수출 고심” 유출된 미 기밀문건에 담겨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한 미국 정부의 100여 쪽가량의 기밀문건이 SNS에 유출돼 논란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유출된 문건 중 미 정부가 한국 등 동맹국들을 감청한 내용이 담겼다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4월 말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문을 앞두고 불거진 이번 사안을 놓고 한·미 양측의 향후 대응이 주목된다. 9일 미국 뉴욕타임스(NYT)와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유출 문건에는 지난달 교체된 김성한 전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전 외교비서관이 3월 초 나눈 대화 내용이 담겨 있다. 쟁점은 미국의 한국 포탄 수출 요청이었고,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지원할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해 온 정부는 고심했다.
뉴욕타임스 “NSA·CIA 등서 정보 수집”
이 전 비서관은 “한국이 미국의 요구에 응해 포탄을 미국에 제공할 경우 정부는 미국이 ‘최종 사용자’가 될지를 걱정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내용은 ‘신호정보(SIGINT·시긴트)’에 근거한 것이라고 NYT는 전했는데, 통상 ‘시긴트’는 정보기관이 감청에 나설 경우 사용한다.
NYT는 한국 정부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 문제를 압박하기 위해 윤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할 것을 우려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이 전 비서관은 “한국이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방침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정상 간 통화를 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식적으로 해당 정책을 바꾸는 것이 유일한 방법일 수 있다”며 “임기훈 국가안보실 국방비서관이 그와 관련한 최종 입장을 3월 2일까지 결정하기로 약속했다”고 언급했다.
그러자 김 전 실장은 “윤 대통령의 국빈 방문 발표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 무기 제공 관련 입장 변경을 발표하는 것이 겹치게 되면 국민은 이 두 개 사안 간에 거래가 이뤄진 것으로 여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은 3월 7일 발표됐다.
문건에 따르면 김 전 실장은 그 대안으로 폴란드에 포탄을 판매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김 전 실장은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신속하게 제공하는 것이 미국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라며 155㎜ 포탄 33만 발의 폴란드 판매 방안을 제시했다. 이에 이 전 비서관은 “폴란드가 포탄의 ‘최종 사용자’라고 불리는 것에 동의하면서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폴란드가 어떻게 할지 먼저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실은 이 같은 외신 보도에 대해 이날 오전 조태용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회의를 열어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윤 대통령도 이날 관련 내용을 보고받은 뒤 해당 사안을 잘 살펴보라는 취지의 지시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은 이날 오후 브리핑에서 “과거의 전례, 다른 나라의 사례를 검토하면서 대응책을 한번 보겠다”며 “제기된 문제에 대해 미국 측과 필요한 협의를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일단 사실인지 확인이 필요한 문제”라며 “사실로 드러난다면 중대한 사안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입장은 ‘한 번’이라는 표현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윤 대통령의 국빈 방문을 앞두고 이 문제가 양국 관계에 ‘악재’가 되는 것을 경계하는 분위기다. 대통령실은 과거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었지만 한·미 관계를 흔들 사안은 아니라는 분위기다. 외교부 당국자도 이날 “관련 보도를 인지하고 있으며 미국 측과 필요한 협의를 할 것”이라면서 “기본적으로 한·미 동맹의 신뢰는 굳건하다”고 말했다. 한 소식통은 “미국이 동맹국을 도·감청한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고, 과거에도 여러 차례 공개된 일”이라고 전했다.
실제 2013년 미 중앙정보국(CIA) 전 요원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로 미 국가안보국(NSA)의 주미 한국대사관 도청 의혹이 불거졌을 때 정부는 외교 채널을 통해 미 정부에 깊은 우려를 표명한 뒤 납득할 만한 설명 및 조치를 요청했다. 당시 미국 측은 정보활동에 대한 재검토 입장을 전달해 왔지만 이후 사안은 유야무야됐다. 2016년에는 폭로 전문 사이트인 위키리크스가 2008년 미 NSA가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대화 내용을 도청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미 국무부는 지난 8일 성명을 통해 문서 유출 경위에 대한 공식 수사에 착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미 국방부와 법무부는 이미 자체 조사에 착수한 상태다. 유출 문건은 미 합동참모본부가 국가안보국(NSA), 중앙정보국(CIA), 국무부 정보조사국 등 여러 정보기관에서 수집한 정보를 취합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NYT는 전했다.
문건 유출 배후에 친러 세력 가능성
한편 기밀 문건에는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공격 시기와 특정 목표물이 매일 실시간으로 미국 정보기관에 전달된 것으로 나타났다. NYT는 “이 문서들은 미국이 러시아 정보기관에 얼마나 깊이 침투했는지 보여준다”며 “러시아가 알게 됐기 때문에 앞으로 우크라이나 측에 실질적인 피해를 줄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군사·안보 전문가들은 유출 배후에 친러시아 세력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전직 국방부 고위 관리인 믹 멀로이는 “보안에 심각한 구멍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며 “우크라이나와 미국,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피해를 주고자 하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퍼뜨린 것 같다”고 NYT에 밝혔다.
임주리·박태인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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