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 아들과 함께 22일간의 유럽, 시작은 이랬다

유종선 2023. 4. 9.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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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동반 여행은 아이의 감정을 전이받는 일... 덕분에 확장된 기쁨과 경이

N년차 드라마 피디이자 아빠가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과 함께 22일 간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그 기록을 담은 여행 에세이입니다. <편집자말>

[유종선 기자]

22일간 여행의 마지막 일정. 파리 시내의 이 카페에서 다리를 쉰 후, 우린 숙소에서 짐을 찾아 공항으로 떠날 것이다. 지친 채로 아이스크림을 기다리던 아들이 시선을 멀리 두곤 문득 말한다.

"좋은 날들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렸어요."

만 7살 짜리가 하기엔 너무 조숙한 말이다. 그런데 난 웃기지 않았다. 오히려 갑자기 콧잔등이 뜨거워져 당황했다. 나를 스쳐 지나갔던 모든 시간들이 내 앞의 긴 행렬의 군중처럼 걸어가다, 일제히 고개를 돌려 가만히 나를 가만히 응시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를 왜 그렇게 흘려보냈니? 다시 보고 싶지는 않니? 나는 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빠"
"응?"
"왜 좋은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갈까요? 나쁜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가면 좋을 텐데."

여전히, 나는 답할 말을 찾지 못한다. 아이들은 어디선가 읽고 들은 말들을 조합하여 불시에 내뱉는다. 그리고 어른들은 종종 마음을 습격 당한다. 시간이 빨리 지나간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은 그만큼 네가 여행을 즐겼기 때문일 거야, 라고 대답해주려다 말을 아낀다.

"그러게..."

가끔 아들이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외계인은 크나큰 호기심으로 인간의 감정과 습성을 익히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때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생의 질문을 만나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다 가끔은 좌절감에 눈물이 맺히고야 만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오히려 내가 불시착한 것 같기도 했다. 삶이라는 비행에서 불시착해 사막에 떨어졌는데, 우주에서 온 소년을 만난 거다. 어린 왕자를 만난 생떽쥐베리처럼. 우리는 사막에서 지친 채로, 우리의 여우와 장미에 대해 이야기해 온 것만 같았다.

돌아가자, 집으로
엄마가 널 기다리고 있어.

아이와 유럽에 온 이유 
 
▲ 두 캐리어 짐을 줄이기가 어렵다.
ⓒ 유종선
    
아이가 자라는 순간은 그때 그때의 예쁨이 있고, 한 시절의 아름다움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들 했다. 그러니 부모로서 이를 소중히 누리라고, 미리 경험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말해주었다. 알지만 그렇게 잘 되지 않았다. 육아는 힘들었고 난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리고 도망의 큰 명분이 있었다. 직업적으로 자리잡아야 한다는 절대적 사명. 일에 대한 강박과 불안, 조바심이 그 시절을 누리기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시절만의 예쁨들은 차례로 흘러 지나갔다. 지나고 나니 아쉬웠다. 지나고 나니 그렇게 조바심을 낼 필요도 없었다. 되는 일은 됐고 안 되는 일은 안 됐다. 그렇게 흘러가 버리는 게 삶인가 싶었다.

긴 여행, 멀리 가는 여행을 계획하기는 더욱 힘들었다. 먼저 일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눈치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각자 자기 직업이 있는 부부가 서로 시간을 맞추기도 어려울 뿐더러, 아이가 긴 여행을 버텨내기도 어렵다. 경제적으로도 부담이다. 그러니 유럽은 먼 꿈일 뿐이었다.

지난 여름엔 내가 시간이 안 됐는데, 이번 겨울엔 아내가 시간을 만들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위기감이 들었다. 더 자라기 전에 아들의 시간을 내게 새겨넣고 싶었다. 아빠와 아들의 시간을 진하게 확보하고 싶었다. 그래서 얘기했다. 둘만이라도 꼭 다녀오겠다고. 허락하는 한 가장 길게.

아내는 항공사 홈페이지를 열고 가능한 날짜들을 바로 검색해주었다. 아내는 내가 진심으로 상황이 허락하는 가장 긴 기간을 다녀올 것이라고는 생각 못한 모양이었다. 열흘만 다녀와. 아님 보름? 나는 가능했던 22일을 다 채울 것을 고집했다. 정말 다녀올 수 있겠어? 불신의 눈초리.

나중에라도 취소하고 날짜를 줄이거나, 중간에라도 아내가 합류하거나 등의 여러 가능성을 생각하며 일단 전체 날짜를 정했다. 흥, 내가 취소할 줄 알고? 2월 초부터 2월 말까지.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들어가서 프랑스 파리에서 나오는 일정이었다. 그리고 모든 세부 사항들은 이 항공표 예매로부터 시작됐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짜 가는구나. 가야지, 가야지 시간을 보내다 너무 늦어버렸다는 핑계를 대고 대충 가까운 데로 짧게 다녀오는 가능성이 사라졌구나. 이제는 준비를 해야만 한다.

목적지를 정한 논리는 이러했다. 22일이나 날짜를 확보하기는 앞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멀리 가자. 유럽이면 적절하다. 그리고 겨울이니 따뜻한 지중해 연안이 어떨까. 스페인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궁금하다. 그리고 파리.

난 어린 시절 파리에서 아들의 나이였을 때부터 3년을 산 적이 있다. 많은 것을 잊었으나 제2의 고향같은 친근감이 있다. 아들을 데리고 그 시절의 기억을 되새겨보고 싶었다. 3주 정도의 여행 기간 중에 날씨가 조금이라도 따뜻해지지 않을까 기대하며, 따뜻한 남에서부터 북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마드리드보다는 바르셀로나가 좀 더 직항편 날짜 선택의 폭이 넓었다. 그렇게 바르셀로나에서 파리까지의 큰 계획이 섰다. 아내는 많이 이동하지 말 것을 조언했다. 짐을 가득 싸들고 어린 아이 손을 붙들고 이동하는 일은 너무 힘들거라고.

두세 개 도시 정도에만 있다 와도 대단한 거라고. 그런데 이미 내 마음 속에는 뭉게뭉게 배낭여행 시절의 정신이 철 없이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기왕에 가는 김에, 제대로, 더 많이! 어떤 고생을 하게 될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채로....

아들의 예열 기간
 
▲ 오르세 미술관의 시계 여러 시계 중에 하나.
ⓒ 유종선
 
아들 우주(가명)의 흥분은 어마어마했다. 어린이 여행 책으로 이미 기대감을 한껏 부풀린 후였다. 그 책들은 열흘의 날짜 안에 하나의 나라에 대여섯 도시를 훑는 일정을 소개해주고 있었다. 마침 우리 여행 기간이 22일이고 두 개 국가를 가기로 했으니 이 책의 설계와 얼추 맞았다.

다만 이 책들은 현실적인 여행 책이 아니라 다른 나라 소개에 가까운 책들이었다. 어린이 책답게 흥미를 돋울 만한 내용들을 열흘이라는 직관적인 날짜 아래 잘 배열한 것이었다. 오히려 나보다 우주가 더 많은 곳을 돌아보기를 뜨거운 열기로 촉구하고 있었다.

외국 여행을 가면, 처음엔 최대한 길게 많은 것을 보는 동선에 집착하게 된다. 어렵게 기회를 만들었으니 다다익선으로 훑겠다는 정신이다. 그런데 이런 주마간산 여행을 하고 나면 과연 여행지를 제대로 느끼기나 한 것일까 자문하게 된다. 적게 다니더라도 한 군데에 오래 차분히 눌러 앉아 여유 있게 그곳의 공기를 현지인처럼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그런데 또 이런 체류식 여행을 하고 나면, 자주 있는 기회도 아닌데 더 열심히 볼 걸 그랬나 싶다. 이번 여행에서 아들과 나는 후자로 마음의 일치를 본 셈이었다. 둘 다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같은 테마를 마음에 품고 철없이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아이 엄마의 근심에 찬 눈초리 아래서.

흥분한 우주의 질문을 받아주기 벅차서 급기야 <꽃보다 할배> 스페인 편과 파리 편을 보여주었다. 그 시간만큼 자유를 누리려는 계획이었는데 그 시간을 그대로 같이 시청하게 되었다. 그리고 네 할아버지의 여행 동선은 그대로 아들이 요청하는 바이블이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우주가 꼭 보고자 하는 도시가 있었다. 카르카손. 아들과 즐기는 보드게임의 이름이다. 카르카손의 성을 본따 만든 게임의 현장에 꼭 가야 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정한 동선은 다음과 같다. 바르셀로나-그라나다-세비야-마드리드-니스-툴루즈-카르카손-파리. 그리고 중간 중간에 당일 투어를 통해 근교여행 다녀오기. 창대한 계획이다.

<꽃보다 할배>를 몇 번씩 다시 보는 일만으로는 아들의 흥분을 낮추지 못했다. 우주는 급기야 스페인어와 프랑스어 강좌를 찾아듣기 시작했다. 유튜브에서 기초편을 찾아 듣더니 전체 강의를 결제해달라고 졸랐다. 무시무시한 열의였다. 우주의 열의에 떠밀려 나도 더듬더듬 스페인어 알파벳과 인삿말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이게 웬일이야. 상상하기엔 좋지만 막상 계획하고 준비하려면 귀찮고 피곤한 게 여행인데, 이 소년의 엄청난 흥분 덕에 나도 덩달아 상기됐다. 아이와 여행을 간다는 것은 아이의 감정을 전이받는 일이구나. 나 또한 덕분에 확장된 기쁨과 경이를 누릴 수도 있겠구나.

<꽃보다 할배>에 감화된 아들은 나와 '사전모임'을 주제로 동영상을 찍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영상을 많이 찍기 시작하면 여행을 제대로 할 수도 없고 아빠가 너를 잘 챙길 수도 없을거야, 라고 말해주며 아주 살짝 대충 찍고 끝냈다. 우주야, 우리의 여행이 예능프로그램이 될 순 없을 거야. 하지만 아빠가 여행기는 써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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