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죽었어야 했나"... 사라진 '7분'의 진실
[이준목 기자]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이 있긴 있는데 진짜 살 수 있는 건가? 내가 좀 더 다쳤어야하나? 아니면 이럴 바에야 내가 '그냥 죽었으면' 이게 더 파장이 컸을까. 이게 진짜 살아있어서 바꿀 수 있는 게 맞나?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든다"
'부산 서면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 박세연(가명)씨의 호소다.
법과 정의는 대체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 아무런 잘못도 없이 억울한 피해를 당했음에도 보상이나 위로는커녕, 오히려 미래의 또다른 가해를 걱정하며 불안에 떨어야 하는 것이 피해자가 감당해야 할 현실이라면?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 아닐까.
▲ SBS 시사고발 <그것이 알고싶다> 한 장면. |
ⓒ SBS |
4월 8일 방송된 SBS 시사고발 <그것이 알고싶다> 1347회는 '사라진 7분-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진실'편을 통하여 불특정 다수를 향한 반사회적인 스토킹 폭력 범죄의 위험성과 우리 사회의 범죄예방 시스템의 허점, 그리고 충격적인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피해자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조명했다.
2022년 5월 부산광역시 서면의 한 오피스텔, 세연씨는 지인들과 모임을 마치고 새벽 5시경에 귀가하여 1층 현관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의문의 남성에게 기습적인 폭행을 당했다. 가해자는 뒤에서 접근하여 돌려차기로 세연씨의 머리를 강하게 가격했다. 세연씨가 벽면에 머리를 강하게 부딪혀 쓰러진 뒤에도 가해자는 수차례 발길질을 퍼부으며 무자비한 공격이 이어졌다.
세연씨가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가해자는 그녀를 어깨에 들처업고 CCTV가 없는 곳으로 이동했다. 약 7분후, 가해자가 걸어서 유유히 오피스텔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잠시후 세연 씨는 입주민들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됐다.
신고자와 의료진에 따르면 당시 세연씨는 머리에 심각한 중상을 입어 선혈이 낭자했고 뇌신경이 손상되어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는 증상까지 있었다. 다행히 기나긴 치료와 재활 끝에 세연씨는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하여 다시 걸을 수는 있게 됐다. 하지만 그날 이후 세연씨는 극심한 정신적-육체적 후유증에 시달리며 이전의 꿈많고 행복하던 평범한 일상을 잃어버리게 됐다.
사건 발생 3일 후, 가해자는 여자친구와 도주행각을 벌이다가 부산의 한 모텔에서 경찰에 검거됐다. 범인은 전직 경호업체 출신의 31세 이정호(가명)였다. 그는 피해자 세연씨와는 일면식도 없던 인물이었다. 이씨는 사건 당시 주취 상태로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세연씨가 통화를 하면서 자신에게 뭐라고 시비를 거는 것으로 오인하여 홧김에 우발적인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세연씨는 피해자였지만 폭행 당시의 충격으로 기억상실 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세연씨는 사고 전후 3일간의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이 왜 병원에 실려왔는지도, 왜 폭행을 당했는지 아무 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세연씨는 답답한 마음에 자신의 사건 기록들을 직접 확인했다. 본인에게는 가장 끔찍한 기억일 폭행 당시의 CCTV 영상도 수없이 돌려봤다. 세연씨가 꼭 찾고 싶었던 기억은 가해자가 자신을 CCTV 사각지대로 데려간 이후 '7분간의 행적'이었다. 세연 씨는 "제가 기억을 못하니까 결국 가해자의 말이나 증거가 다인데, 진짜 잊고싶은 기억인데도 뭔가 되살아났으면 좋겠다. 이제는 뭔가 그냥 알고 싶다는 생각이 더 크다"고 고백했다.
경찰 조사 결과, 당시 세연씨는 이정호의 주장과 달리 시비를 걸거나 통화를 한적이 없었다. 그러자 이정호는 정신과 진료 기록을 제시하며 환청이 들린 것 같다고 슬쩍 진술을 바꿨다. 그러나 이광민 정신과 전문의는 진료 기록과 처방전을 분석한 결과, 가해자가 심각할 정도의 정신적 증상이 나타나는 병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심지어 이정호 본인도 반성문에서 '정신과 약을 복용한 것은 맞지만, 정신병이 있거나 미친 사람은 아니다'라고 인정했다.
황민구 법영상분석연구소 소장은 CCTV 영상분석을 통하여 이정호의 행동에서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목적성이 보인다고 판단했다. 이정호는 일부러 피해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거리를 두고 몰래 미행하는 듯한 모습이 포착됐다. 피해자의 머리를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도 단순폭행이 아닌 의식을 잃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다는 분석이다.
반면 이정호는 7분간의 행적에 대하여 피해자가 의식을 잃고 움직이지 않자 '겁이 나서 상태를 확인하고 피해자를 깨우려고 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목격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세연씨는 발견 당시 옷매무새가 흐트러있었고 속옷은 벗겨져 한쪽 다리 아래에 걸처져 있었다. 강간-추행 등 성범죄가 유력한 정황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이정호는 모든 것을 술과 정신 건강 문제로 돌리며 선처를 호소됐다. 경찰에 체포되기 전에 이미 자수할 생각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정호는 폭행 사실은 인정했지만 유독 성범죄에 대해서 만큼은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
세연씨는 당시 부상이 심했던데다 기억상실 증세로 성범죄 가능성에 대하여 뒤늦게 인지했기 때문에 피해자의 신체에서 증거를 확보할 수 있는 타이밍을 놓쳤다. 경찰 조사결과 당시 세연씨가 입었던 속옷에서는 성범죄를 증명할 유의미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범인 이정호의 정체는 무엇이며 왜 일면식도 없는 여성에게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 것일까. 놀랍게도 이정호는 성매매, 협박, 상해, 폭행 등으로 무려 전과 18범의 상습 범죄자였다. 돌려차기 사건도 출소 후 불과 3개월만에 저지른 일이었다.
이정호의 지인들은 사건 직후 그가 주변에 직접 떠들고 다닌 내용들과 평소의 성향을 고려할 때 처음부터 '피해자를 성적 대상으로 노린 것'이라고 분석했다. 사건 당시 이정호가 세연씨를 이동시킨 곳은 비상구 계단과 연결된 곳이었고 문 손잡이에서는 세연씨의 혈흔이 발견됐다. 이정호의 진짜 목적은 기절한 세연씨를 비상구로 데려가 본격적인 성범죄를 자행하려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정호는 도주중에도 여자친구의 휴대전화로 '강간'이나 '서면 살인사건'같은 단어를 검색한 것이 확인됐다.
세연씨는 사건 이후 시간이 흘러서 이전에는 없었던 항문파열 증상을 뒤늦게 확인했다. 의료진은 상태를 고려할 때 성폭행이나 외력에 의한 부상일 가능성이 있다는 소견을 내렸다. 사건 당시 세연씨가 착용했던 바지의 엉덩이 부분에서 이정호의 DNA가 일부 검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정도만으로는 성범죄를 확실하게 입증할 증거로는 부족했다. 사건이 벌어난지 약 한달이 지나서야 피해자의 인지로 뒤늦게 성범죄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증거를 확보할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이다. 유력한 증거물이 될 수 있었던 피해자의 바지와 속옷도 범행 당시의 전체가 아닌, 일부를 닦아낸 면봉으로 얻어낸 간접 증거에 그쳤다.
전문가들은 많은 단서가 성범죄 가능성이 유력함을 가리키고는 있지만 모두 정황일뿐 구체적인 증거가 되기는 어렵다고 분석했다. 도진기 변호사는 "성폭행이 유죄를 받으려면 가해자의 자백, 피해자의 직접 진술, DNA, 최소한 셋 중에 하나는 있어서야하는데 아무 것도 없다"고 지적했다.
이정호는 1심에서 폭행과 살인미수 혐의가 징역 12년을 선고받았으나 형량이 과하다며 항소한 상태다. 현재 이정호는 2심 재판을 준비하며 감형을 받기 위하여 재판부에 반성문을 열심히 제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정호의 지인이나 구치소 수감동기 등이 전해준 이정호의 근황은 충격적이었다. 이정호는 구치소에서도 서면 돌려차기 사건의 범인이라고 자랑하는 가하면, '틈만 나면 탈옥할 것' '나가면 피해자를 죽이겠다. 그때 맞은 것 이상으로 패주겠다' 등등 공공연하게 보복을 선언하고 다녔다고 한다. 심지어 이정호는 피해자의 이름과 주민번호, 집주소까지도 다 알고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고.
전문가들은 대한민국 법이 주취나 심신미약, 초범이거나 동종 전과의 부재, 사후 반성 등을 명분으로 중범죄를 저지르고도 손쉽게 솜방망이 처벌이나 감형이 내려지는 관행의 문제점을 우려했다.
▲ SBS 시사고발 <그것이 알고싶다> 한 장면. |
ⓒ SBS |
윤정숙 법무정책 연구원 박사는 "법원에서는 폭력의 범죄가 높지 않으면 벌금형을 선고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범죄자들은 또다른 범죄를 저질러도 크게 처벌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표창원 범죄심리전문가는 "한국 연쇄살인범 중 가장 많은 수가 전과자다. 그리고 출소 6개월 이내에 첫 살인을 시작한다"고 설명했다. 표창원은 "그들의 이전 범죄 전과는 대부분 살인과는 관련이 없었다"면서도 "이상성격, 반사회적인 특성, 공격성 등 이 부분에 대한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반드시 재범을 저지른다"고 경고했다.
이정호 역시 어린 시절부터 각종 폭행 사건을 저질렀고, 성매매 사기단 활동때는 피해자에게 흉기를 통한 폭행 및 물고문까지 자행하는 등, 범죄를 거듭할수록 그 수법이 점점 더 대담하고 잔인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고은 변호사는 "형사 사건에서 폭력 범죄에 대하여 검찰이든 재판부는 너무 안일하게 보는 경향이 있어서 처벌의 수위가 낮은 게 문제"라고 일침을 놓으며, "폭력도 상습적이 습벽"이라고 쓴소리를 날렸다.
박지선 범죄심리학자는 "이정호같은 경우는 재범 가능성이 높은 만성적인 범죄자"라고 분석하며 "금방 들통날 수 있는 거짓말도 상습적으로 저지르고 있다. 이러한 만성적 범죄자들은 출소하자마자 또 범죄를 저지르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제 터질지모르는 시한폭탄과 같다"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이정호는 경찰의 재범위험성 심리평가에서도 모두 '위험'에 해당하는 높은 점수가 나온 것으로 드러났다.
더욱 심각한 부분은 이정호가 자신의 풍부한 전과 경험을 악용하여 본인이 저지른 범행을 은폐하거나 형량을 줄이는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데 있다. 이정호가 주장하는 구호조치, 자수예정, 심신미약 등은 모두 '양형 기준'과 직접 관계된 내용들이다. 성범죄만큼은 한사코 부정하는 것도 형량을 의식한 계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이정호는 <그알> 제작진과의 접견에서도 "성범죄는 결백하다. 검사가 여성이라 여자(피해자) 편이어서 억울하다"는 식으로 주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구치소 수감동기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 '자기는 여기 있는 게 억울하다. 3년받을 것을 12년간 받았다. 재판부도 쓰레기고 다 죽어야한다'고 이야기했다. 반성하는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할 수 없다"고 폭로했다.
또한 이정호는 구치소 내에서도 어린 소년수들을 대상으로 금품갈취를 하고 자신의 성욕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했다고. 이정호의 전 여자친구와 지인에게도 연락하여 '너는 내 손바닥 안이다'라고 협박하거나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는 놀라운 폭로들이 이어졌다.
피해자 세연씨에게도 이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세연씨는 "저도 살아있고, 그 사람도 살아있으니까. 12년뒤 에는 제가 아무 데도 못갈 수도 있을 것 같다. 과연 그때는 제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을까?"라며 두려움을 호소했다.
전문가들은 현재 진행중인 2심에서 '사라진 7분'에 대한 진실도 다시 규명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성범죄 혐의가 인정될 경우 강간 및 살인미수가 성럽되면 형량은 최소 20년에서 최대 사형이나 무기징역 선고까지도 가능하다.
표창원은 최근 불특정 다수에 대한 범죄가 그저 '묻지마 범죄'라는 범주로 성급히 묶이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 사건은 명백한 목적과 이유를 가진 사건이다. '묻지마'라는 용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누군가를 쫓아가서 가혹한 폭력을 저질렀다"고 분석하며 "성폭행 목적의 불특정인 대상의 '스토킹 살인 미수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살아있기에, 바꿀 수 있다."
피해자 세연씨의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것은 피해자 홀로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가해자는 버젓이 살아있고 여전히 반성도 죄책감도 없이 옥중에서도 자신의 안위와 또다른 범행만을 생각하고 있다.
지금 법과 사회가 해야 할 역할은 '사라진 7분'의 진실 규명을 통하여 가해자의 책임을 제대로 묻고, 동시에 억울한 피해자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도록 튼튼한 보호망을 만드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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