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축구의 본보기' 손흥민이 보여준 희망
[이준목 기자]
'살아있는 전설' 손흥민(토트넘)이 한국과 아시아 축구사에 길이남을 이정표를 세웠다. 아시아 선수 최초의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EPL) 통산 100골이라는 대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4월 8일(이하 한국시간) 영국 런던의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2023 EPL 30라운드 홈 경기 브라이턴 앤드 호브 앨비언 전에서 손흥민은 새로운 역사를 썼다. 선발출장한 손흥민은 전반 10분 팀에 리드를 안기는 선제 득점을 터트렸다.
경기장 왼쪽에서 페리시치가 패스한 공을 이어받은 손흥민은 특유의 감아차기를 시도했고, 공은 포스트 구석으로 골키퍼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궤적을 그리며 빨려들어갔다. 지난 3월 12일 노팅엄 포레스트전 이후 약 한달만의 득점이자 손흥민의 올시즌 리그 7호골(전체 11골)이었다.
토트넘은 전반 34분 코너킥 상황에서 루이스 덩크에게 헤딩골을 내주며 동점을 허용했으나, 후반 34분 해리 케인의 결승골로 다시 되찾은 리드를 끝까지 지켜내며 2-1로 승리했다. 이로써 토트넘은 16승 5무 9패(승점 53)으로 5위를 유지했고 4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승점 56)를 3점차로 추격하면서 다음 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티켓 획득을 향한 경쟁을 이어갔다.
손흥민은 이날 자신의 EPL 260번째 경기만에 통산 100골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세웠다. EPL 역사상 통산 100골 이상을 기록한 선수는 손흥민까지 단 34명에 불과하다. EPL 최다골 보유자는 260골의 앨런 시어러이고, 그 뒤를 웨인 루니(208골), 해리 케인(205골), 앤디 콜(187골), 세르히오 아구에로(187골), 프랭크 램파드(187골), 티에리 앙리(175골) 등이 잇고 잇다. 하나같이 EPL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전설적인 선수들이다.
100골 클럽은 잉글랜드 국적이 아닌 선수로는 14번째이며, 아시아 출신 선수로는 역대 최초다. 손흥민은 이 득점으로 매슈 르티시에(은퇴)와 EPL 통산 득점 공동 33위에 이름을 올리며 역대 전설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손흥민의 바로 위에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103골)를 비롯하여 디디에 드록바(104골)-대런 벤트(106골)-폴 스콜스(107골) 등이 가시권 안에 있다.
손흥민은 2015년 8월 독일 레버쿠젠을 떠나 토트넘 유니폼을 입으며 잉글랜드 무대에 처음 진출했다. 2015-16시즌이었던 2015년 9월 20일 크리스털 팰리스와의 6라운드(첫 리그 선발 출전)에서 역사적인 EPL 데뷔골을 터트린 손흥민은, 그로부터 8시즌째 토트넘에서 활약하며 일수로는 무려 2757일 만에 대망의 100골(50도움) 고지에 등극했다. 프로 개인통산 정규리그 기록은 독일 분데스리가 시절의 41골을 포함하면 총 141골이다.
손흥민이 전설의 반열에 올라서기까지는 치열한 도전과 극복의 연속이었다. 손흥민은 잉글랜드 데뷔 첫해, 리그에서 고작 4골을 넣는 데 그쳤다. 한때 독일 유턴까지 심각하게 고려했던 손흥민은 고심 끝에 팀에 잔류했고 2016-17시즌 리그 14골을 터뜨리며 마침내 재능을 만개하기 시작했다. 이후 손흥민 2017-2018시즌 12골, 2018-2019시즌 12골, 2019-2020시즌 11골, 2020-2021시즌 17골을 기록하며 꾸준히 리그에서 두 자릿수 득점을 보장하는 선수로 성장했다.
2021-22시즌에는 개인 커리어하이인 무려 23골을 터뜨리며 아시아 선수 최초의 EPL 득점왕(모하메드 살라와 공동)이라는 역사적인 대기록을 수립했다. 또한 이란의 알리레자 자한바크시가 갖고 있던 아시아 선수 유럽리그 1부리그 한 시즌 최다골(21골) 기록도 다시 썼다.
하지만 2022-23시즌은 손흥민에게 예상못한 시련의 시간이었다. 득점왕 시즌의 기세를 이어가며 조기에 100골 돌파도 기대되었지만, 정작 원인모를 슬럼프에 시달리며 골을 추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골가뭄이 걸어지며 언론의 압박과 심리적인 부담이 높아졌고, 시즌 중반에는 안면이 골절되는 큰 부상을 당하여 수술대에 오르는 우여곡절도 있었다. 또한 부상을 안고서 12월에는 태극마크를 달고 카타르월드컵에 출전하는 강행군을 이어가야했다. 최근에는 외조부상을 당하며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손흥민은 멈추지 않고 한걸음씩 우직하게 전진했다. 리그에서 총 27경기(교체 3회)에 출전하여 8라운드만에 레스터시티전 헤트트릭을 시작으로 포문을 열었고, 19라운드 팰리스전(4호), 24라운드 웨스트햄전(5호), 27라운드 노팅엄전(6호)을 차근차근 거쳐 브라이턴전에서 7번째골을 추가하여 기어코 대기록을 완성했다.
100골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기록이지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골이라면 역시 2019-20시즌 2019년 12월 번리전 득점을 빼놓을 수 없다. 손흥민은 자기 진영에서 볼을 잡아 드리블을 시작하여 약 80m 가까운 거리를 단독 질주하며 상대 선수 6명을 잇달아 제친 뒤 침착한 오른발 슈팅으로 골망을 갈랐다. 이 골로 손흥민은 2020년 국제축구연맹(FIFA)이 한 해 최고의 골에 주는 '푸슈카스상'을 품에 안았다.
손흥민의 EPL 한 경기 최다득점과 구단별 최다득점은 모두 사우샘프턴을 상대로 기록했다. 손흥민은 2020년 9월 사우샘프턴전에서 한 경기 최다인 4골을 넣는 '포트트릭'을 달성했다. 손흥민은 사우샘프턴을 상대로 10골을 터뜨려 유난히 강한 면모를 보였다. 그 뒤로는 레스터시티(9골), 크리스탈 팰리스(7골)에도 강한 면모를 보였다. 헤트트릭은 사우샘프턴을 비롯하여 애스턴 빌라, 레스터시티전에서 한 차례 씩 기록한 바 있다.
양발의 달인답게 좌우를 가리지 않고 골을 기록한 것도 돋보인다. 손흥민은 100골 중 오른발로 55골, 왼발로 41골을 넣었고, 헤딩으로 4골을 추가했다.
높은 필드골 득점 순도는 손흥민의 또다른 자랑거리다. 손흥민은 100골을 넣는 동안 페널티킥은 단 1골에 불과하고 나머지 99골을 모두 필드골로 채웠다. 득점왕을 기록했던 지난 시즌에도 공동 득점왕인 살라와 달라가 23골중 PK는 전무하다는 것이 더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이유다.
이제 손흥민은 아시아 축구사에서 하나의 상징적인 롤모델이 됐다. 그가 대기록을 이룬 경기 직후 영국 방송사 BBC와의 인터뷰에서 개인적인 기쁨보다도 아시아 축구를 대표한다는 책임감을 언급한 대목이 눈에 띈다.
손흥민은 "오래 꿈꿔왔던 상황이 현실이 됐다. 프리미어리그에서 100골을 넣는다는 건 엄청난 경험"이라는 자부심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경기를 지켜보며 모든 한국과 아시아 선수들이 '나도 할 수 있다'고 믿길 바란다. 아시아의 젊은 선수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는 소감을 밝혔다.
또한 손흥민은 이날 평소의 사진찍기 세리머니 대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던 동작이 최근 세상을 떠난 외할아버지를 추모하는 의미였음을 고백했다. 손흥민은 "지난 몇 주간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최근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마음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이 골을 할아버지께 바치고 싶다"고 전했다.
대기록을 수립한 손흥민을 향하여 세계의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EPL 사무국은 공식 SNS 계정을 통해 한글로 "축하합니다. 손흥민 선수!"라는 메시지를 띄웠다. 소속팀 토트넘도 SNS 계정으로 손흥민의 통산 100호골 달성 소식을 알리며 "축하해 쏘니"라는 문구를 올렸다. 해리 케인과 크리스티안 에릭센 등 토트넘 전-현 팀동료들, 국가대표팀 동료들, 해외 주요 언론과 세계 각자의 팬들도 일제히 SNS와 온라인에서 손흥민의 기록을 축하하는 메시지가 이어지고 있다.
손흥민도 자신의 SNS에 직접 글을 올리며 주변의 축하에 화답했다. 손흥민은 "EPL 100골, 이 숫자를 기록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가 된 것이 자랑스럽고. 또 자랑스럽다"라고 전하며 "내가 가능한 일이라면 각 가정에서 자라는 모든 사람에게도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 여정을 도와준 모든 감독과 스태프, 팀원, 친구와 가족들에게 정말 감사하다. 이 선물은 모두 당신들 덕분이다. 사랑을 담아. 쏘니가"라며 다시 한번 진심어린 감사를 전했다.
이제 손흥민이 개척한 길은 앞으로 그 뒤를 이을 아시아 선수들이 뛰따라 가야할 목표이자, 길을 밝혀주는 등대가 됐다. 그리고 100골은 끝이 아닌, 앞으로도 손흥민이 써내려갈 새로운 전설을 향한 또다른 시작일 뿐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